시간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마흔은 아무것도 아니야, 쉰 살은 돼야 인생의 절정을 맛보는 거지, 예순은 새로운 마흔이야······ 시간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이 정도다. 객관적인 시간이 있다. 그리고 주관적인 시간도 있다. 가령, 손목의 요골동맥 바로 옆에 시계의 앞면이 오도록 차는 경우. 이런 사적인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시간이며, 기억과 맺는 관계 속에서 측정될 수 있다. 그래서 이 기묘한 일이 일어났을 때 - 새로운 기억이 느닷없이 나를 엄습했을 때 -는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마치 강물이 역류한 것 같았다.
봄볕이 물에 내려앉는 것을 나란히 앉아 바라보았다. 싸구려 커피는 향이 쉽게 흩어졌다. 나는 무언가 말했고 친구는 불편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있잖아, 그건 너무 극적으로 들려. 친구의 속눈썹에 앉은 빛이 날개를 파닥였다. 조그만 나비가 날아올랐다.
그날 우리는 천변에 앉아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억이 얼마나 쉽게 왜곡되는지를. 친구는 말했다. 나는 그날이 초겨울 같았고 그래서 바람을 피하기 위해 일찍 방에 들어와 홈쇼핑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걸 책으로도 썼는데 말이지. 친구의 동행이 책을 보고 당황해 전화를 걸어왔다고 했다. 그날은 여름이었어, 우리는 더워서 일찍 방에 들어갔고, 그렇게 오래 홈쇼핑을 보지도 않았는데··· 누구의 기억이 옳은 걸까? 친구는 웃었다. 기억에 옳고 그름이 있는 걸까? 나는 그렇게 대답했던가 아니면 혼자 생각만 했을지도. 유년 시절에 들었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모두 달라서 나는 쉽게 어떤 죽음을 실제가 아닌 상상의 영역에 밀어 넣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죽음은 같은 증언자가 다른 시간대에 있을 때 다시 달라졌다. 죽음은 실재했던 걸까, 수많은 이들의 기억이 평행세계를 만들어 그는 여러 번 다르게 죽었나. 죽음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거기에 이르는 경로는 각자 달랐다. 평범한 것도 있고 비현실적인 것도 있었다.
그러니 누군가의 일기장을 읽는 것은 옳지 않다. 그의 사적인 영역을 존중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건 어떤 의미의 왜곡된 역사다. 에이드리언은 말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일기장은 부정확한 기억이 기술한 불충분한 문서다. 그건 태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곡된 확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궤도를 수정하니까. 참 놀랍고도 무섭지 않은가. 시계를 돌려 차던 개구쟁이 소년들은 마치 나비처럼 뒤틀린 운명의 궤도를 날아간다. 나비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기억은 난반사되고 저마다 다른 풍경, 다른 표정을 비춘다. 시간은 기억 사이로 흘러와 파편들을 녹이고 둔하고 비좁은 뇌에는 토막 난 손목, 흘린 머리카락, 하수구를 통해 불길하게 흘러내리는 정액만 남는다. 기억은 사실이 아니며 서사도 아니다. 우리는 시간에 녹다 남은 파편을 주워 '사적인 문학'으로 재구성할 뿐이다. 보다 바람직한 모습으로.
있잖아, 그건 너무 극적으로 들려. 당연하다. 나는 나의 기억을 혓바닥 위에 올리고 다시 누군가에 전달하고 있으므로. 여기에 얼마나 많은 각색이 일어났는지 창작자인 나도 알 수 없다. 단 한 통의 편지가 마치 운명의 조종처럼 모두의 머리 위에 울리고 우주의 공전 궤도를 돌아 다시 심장에 박힌다. 녹슬어 부스러진 탄환이.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때로 어떤 일은 마치 예언서처럼 우리를 끌고 가지만.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