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벽조차 소리치는 마당에 제가 왜 그 말을 하면 안 되나요? 어머니와 제가 그 여자의 편지를 읽을 수 없다면 말하건 말건 무슨 상관이에요? 어머니조차도 저 텅 빈 벽에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이가 이 텅 빈 종이에서 그녀의 필적을 읽지 못할 이유가 있겠어요? 어머니는 이 집 도처에 그녀가 있고, 다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이 곁에 더 가까이 있다는 걸 모르시겠어요?" 샬럿은 의자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격렬하게 몰아치는 흐느낌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떨렸다. 어깨를 짚는 손길에 고개를 들어보니 시어머니가 그녀 위에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얼굴은 훨씬 더 작고 쇠약해진 듯 보였지만, 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했다. 샬럿은 몰아치는 고뇌 속에서도 이 과단성 있는 영혼이 주는 영향을 느꼈다.
<석류의 씨> 중
세상의 모든 계단은 비밀을 감추고 있다. 동백의 뿌리에는 저주 항아리가 숨겨져 있다. 죽은 벚나무 아래엔 목이 길고 손이 흰 여자가 안개처럼 희미하게 흐른다. 유령의 필적을 알아볼 수 있는 이는 죄책감을 가진 자뿐이다. 벽에는 으레 뼈 한 조각 정도는 감춰져 있고 유달리 소리가 요란한 마룻장 아래엔 살인자의 고백서가 놓여 있다. 당신의 집에 엎드린 그늘이 가끔 운다면 애써 고개를 돌리지 말기를. 등이 서늘한 것은 그저 면역체계의 문제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유령의 집은 살아있는 자의 심장이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뜨거운 방. 판막이 열릴 때마다 피가 쏟아지고 절대 잊히지 않는 순간이 섞여 나온다. 어떤 감정은 몸을 순환하다가 가는 혈관을 막는다. 실종되거나 자백하거나 포기하거나 숨이 끊어지거나. 제령의 방법은 오직 그것뿐.
유령은 깊은 숲에서 나오지 않는다. 새벽에 저수지에서 걸어 나오지 않는다. 폐가의 창에 떠오르지 않는다. 유령은 잠든 당신의 머리맡에 가만히 떠 있다. 지독한 사랑이나 지독한 배신에서. 관자놀이에 스스로 총을 쏠 수는 없어도 죽어야만 하는 광인의 끝없는 자백에서. 유령은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떠오르는 뼛조각. 살아있기에 유령이 있다. 온갖 감정이 뒤엉켜 폐색되어버린 영혼을 열고 유령은 나타난다. 한낮에도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웃고 마시는 만찬의 복판에도.
그러니 유령보다 무서운 것은 살아간다는 것. 모든 것이 거짓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는 공허로 되돌아갈 수 없는 여자의 텅 빈 눈.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여자는 거짓된 삶을, 목구멍을 틀어막으며 흘러내리는 달콤함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삼킨 것들이 장기를 잠식한다는걸. 뼈에 달라붙는다는걸. 뇌의 꽈리들을 녹슬게 한다는 걸. 오로지 단 하나의 목소리만이 그녀 안에 메아리칠 거라는걸. 이미 한 번 속인 적이 있는 디어링 씨는 반드시 계속해서 그녀를 속일 것이다-! 관을 열고 얼굴이 사라진 여자가 몸을 일으킨다. 이것이 유령의 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