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플래너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by 별이언니

지진이 끝날 때가 가까워지면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 알아요? 사토가 물었다. 저물어가는 햇빛 속에서 그의 지친 얼굴이 점점 어둑해졌다. 그가 말을 이었다. 땅의 정신없는 흔들림이 멈추면, 모든 것이, 그러니까 벽에 걸린 그림, 거울, 창문, 고리에 걸어둔 열쇠 등 모든 것이 부르르 떨면서 이상한 소리를 냅니다. 밖에서는 당신이 친숙하게 알던 모든 것이 영원히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르고요.



도리고 에번스가 잭의 터진 동맥을 손가락으로 짓누르며 처절하게 고함을 질렀을 때, 아니, 그보다 좀 더 앞으로 가서 수술을 하던 그에게 다키가 맞고 있으니 구해달라는 요청을 외면했을 때, 그의 마음속 우선순위는 어떻게 정해졌을까. 아니 그보다 좀 더 앞으로, 아니 뒤로 인가. 매일 아침 반복되던 사열에서 나카무라와 대치하며 오늘의 숫자를 정할 때, 그의 마음의 천칭은 어떤 원리로 움직였을까. 나는 도리고 에번스를 비난하지 않는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도리고 에번스를 비난할 수 없다. 그를 살아남은 전쟁영웅으로 칭송할 필요도 없지만. 도리고 에번스는 운이 좋아 의사였고 장교였지만 지옥 같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전쟁 포로였고 그는 매일 최선을 다해 눈앞의 일을 했다. 영웅심도 의무감도 아닌, 그저 그가 살아남기 위한 일이었다. 그것이 도리스 에번스에게는 나카무라의 "샤부" 였고 고아나의 "50엔" 이였으며 다키의 "도둑질" 이었고 수탉 맥니스의 "나의 투쟁"이었고 지미 비글로의 "나팔"이었고 고타의 "목" 이었고 도마뱀 브랜쿠시의 "아내의 초상"이었다. 엘라의 "숨겨진 진실" 이었고 에이미의 "사랑" 이었다. 풍차로 돌격하는 일이, 우리가 만든 환상을 믿는 일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신은 잠든 우리의 눈꺼풀 위에 간혹 잔인한 각성제를 바르기도 한다. 기억은 아프고 수치스러운 부분을 도려내고 살아남아 마땅한 자라는 허위를 만든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은 시에 묻기도 하고 꿈에 묻기도 하며 어떻게든 살아가지만. ​


그들의 진실은 '라인' 위에 있었다. 썩어 문드러지는 피와 살더미로 만든 철도, 오로지 죽기 위해, 오로지 죽음으로 이끌기 위해 만들어진 철도에. 라인 위에 선 자와 라인 밖에 쓰러진 자. 정글에 함께 있었던 자들은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는 환상에 갇혔다. 고아나가 최상민이 되는 일을 감당할 수 없던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을 때려죽인다,라는 지독한 폭력만이, 그 단순한 사실만이 그가 그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끌탕이 바로 전쟁이었고 정글이었다. 교수대에 목이 매달릴 때까지 일본군이 됨으로써 받을 수 있었던 50엔에 집착했던 것도. 나카무라가 전범재판을 피해 도망 다니며 겹으로 뒤집어썼던, 벌레의 목숨조차 귀히 여겼던 선인의 가면은 죽음의 순간 철저하게 벗겨진다. 나카무라는 마약에 취해 전쟁 포로를 죽을 때까지 구타하라고 지시하며 그것을 끝까지 지켜볼 용기조차 없었으며 그 모든 잔혹행위를 천황에 대한 사랑으로 돌리는, 비겁하고 사악한 자다. 스스로의 눈으로 바라보고 스스로의 신념으로 판단할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고 자기 삶을 철저히 타인에게 의탁한 자.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죄인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의지로 범죄를 저지를 용기도 없는, 꿈에 취한 미물은 죽음의 순간 세상이 내는 어렴풋한 소리를 듣고 얼마나 공포에 질렸을까. 겨울의 얼음이 깨지며 섬뜩한 깨달음이 비로소 엄습했을 때. ​


모두가 꿈에 취해 남은 시간을 견디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죽어간다. 환상통이 아니라 환상몽이다. 있었다가 사라진 것에 대한 통증이 아니라 있었다가 사라진 것을 꿈꾸며 견딘다. 그러니 이것이 사랑인지, 이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그녀가 정말 죽었는지조차 알고 싶지 않다. 다만 치졸한 배신을 이어갈 뿐. 숱한 여자들의 등에서 닿을 수 없는 체취를 맡으며 몽롱한 꿈을 계속 꿀 밖에. ​


이렇게 소설이 끝났다면 나는 절망했을 테지만.​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남자와 불길 속에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살아남기 위해 뛰어가는 여자를 보며, 그을린 머리카락에서 나는 탄내와 녹아 문드러지는 살갗을 느끼며 안도했다. 아아, 꿈이 끝났구나. 삶은 이제 시작되는구나. 들이마시는 숨마다 폐가 아프고 관절이 녹고 뼈가 으스러지는 진짜 삶이. 고통이. ​


좁은 길을 지나 마침내. ​


악몽이 끝나고 구원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