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아, 친밀한 이방인

by 별이언니

나도 오래전에 정말 소중한 누군가와 헤어진 적이 있거든. 꼭 너만큼 사랑했던, 너만큼 작고 예쁜 누군가였어. 나는 그 사람을 잃어버린 후 전보다 약하고, 의기소침한 사람이 되었어. 하지만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야. 내 삶에 그 사람의 자리를 남겨놓을 수 있거든.





삶의 태도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치밀하고 아름다운 거짓말의 세계에 빠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가 완전히 기울어 방이 캄캄해질 때까지 눈에 남은 빛을 그러모아 활자를 따라갔다. 살과 피가 없는 존재들을 사랑했다. 나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희박해졌다. 이야기 속의 그들은 복잡하지 않았고 매력적이었다. 일그러지면 일그러진 대로, 순수하면 순수한 대로, 결코 책 밖의 세상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삶의 방식이 책 속에선 가능했다. 동경했다. ​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유미, 안나, 유상, 엠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이해라고 표현하자면 나도 역시 그렇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유미, 안나, 유상, 엠은 아름답다. 삶의 표면을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그녀 혹은 그의 태도는 엄숙하고 진실하다. 결코 표피를 들추고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겠어라는 선언은 타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마도 그녀 혹은 그에게 홀렸던 사람들은 잡히지 않는 아름다움, 마치 물방울처럼 가볍게 떨어지는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음처럼 매혹적인 무상함에 이끌리지 않았을까. 그녀 혹은 그는 그들에게 진실했다. 사랑에 지극하게 응답했다 - 물론 같은 부피나 무게의 감정을 품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 애초에 동일한 무게와 부피의 감정 한 쌍이 서로를 바라보는 기적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건 이 화려한 거짓말의 세계에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녀의 거짓말이 벗겨지고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물리적인 사실이 드러나면 그들은 견딜 수 없어했다. 그녀가 둘러쓰고 있는 껍질은 그녀의 거짓말 위에 세워졌기에 더 아름답고 빛났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지적이고 고상하며 부유한 여성이 이토록 덧없고 불안하고 부드럽고 고요하다니. 그녀의 분위기는 그녀의 거짓 이력이 있었기에 안전했다. 안전하지 않은 매력은 곧 불안으로 이어졌다. 모든 것이 드러나도 사랑했다면 그건 정말 사랑이겠지. 불행하게도 그런 기적은 없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스스로를 지웠기에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를 텅 빈 얼굴이 되어버린 엠은 지금 누구의 거짓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미 타인이 되는 것 외엔 어떠한 생존법도 알 수 없게 된 이는.

부정을 알게 되어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때를 노리면서 태연하게 연기했던 자신 앞에 스스로 무너지며 진실했던 얼굴을 보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 그 얼굴에 비친 내가 유령이라는 사실이. 거짓말쟁이는 만들어진 세계 안에서 늘 진실했고, 유령을 사랑했던 이들은 실제로 거품에 갇혀 있었다. 그것이 그들을 격분하게 만들고, 떠나게 만들고, 영원히 머물게 만든다. 삶의 일부가 그 아름다운 거품에 갇혀 영원히 유실되었다. 거칠고 성긴 첫 문장이 데려온 다음 문장으로 미끄러지는 순간은 그렇게 잃어버린 삶 다음에 온다. 누구의 얼굴로 살고 있는지도 모를 나의 거짓을 인정하는 순간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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