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다글거리는 동거야말로 포스트 모더니티의 다른 말이 아닐까? 반성과 황홀과 이에 대한 메타비평이 한 몸에 거주하는 시대.
말라르메가 아니더라도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단 한 편의 시를 꿈꾼다. 그건 죽는 순간 커다란 외투 주머니에 들어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시. 살아있는 동안 그 시를 만날 수 없다. 그가 꿈꾸는 시는 불가능한 시이며, 그렇기에 그의 목숨이 끝나는 순간까지 유예되는 시이다.
그러니 시인은 얼마나 공포스러울까. 그가 내일 쓰는 시는 반드시 오늘 쓰는 시보다 나아간 시여야 한다.
어쩌면 사랑도 마찬가지일까. 영어로 'the one'이라고 부르는, 우리가 운명의 상대라고 부르는, 신이 나를 세상에 불어넣을 때 거울에 담겼던 영혼의 반쪽을 나눠가졌다고 믿는 사람을 우리는 찾아 헤매는 걸까. 심장이 부풀어 올라 가슴이 메고 목을 가득 채우고 내 주변의 시간과 공간이 멈추는 일. 눈송이와 빗방울이 거꾸로 올라가는 기적 속에 잠시 멈추는 일. 사랑이 정말 있느냐고 물었던 이도 언젠가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되리라. 사랑은 분명히 온다. 그것이 이어진다면 이번 생은 축복을 받았으리라.
시인은 시를 사랑하고 시에 반하고 시에 투신하고 그러면서 시를 바라보고 시를 평가하고 시에 굴복하고 시를 반성한다. 사랑과 혐오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꽃잎이라서. 야누스의 얼굴이다. 시인의 영혼은. 시인이자 비평가이며 독자인 사람이라면.
그의 사랑에 애도를 표할밖에. 그건 천국의 황홀이고 지옥의 찢김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