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는 로봇이다

by 별이언니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긁어모아 들려주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매일 밤 여자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를 떠올렸어요. 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항상 누군가 크게 위험에 빠지고 또 멋지게 극복하고 사랑하고 망하고 죽고 죽이는 이야기였습니다. 여자는 그런 이야기들보다 간혹 웃음이 나오고 듣다 보면 졸음이 몰려오는 그런 이야기를, 그런 이야기를 조용히 읊조리는 목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남자는 쉽게 영원을 입에 담았지만, 여자는 도박꾼들에게 돈을 내어줄 때처럼 무감각하게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답니다.

- 조예은 <탑 안의 여자들> 중 -



좋은 이야기는 바다거품과 같다. 속이 비어 세상 어떤 것이라도 스밀 수 있지만 매끄럽고 말랑해 쉽게 깨지지 않는 것. 그래서 아름다움도 낳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좋은 이야기꾼이란 아마도 하루 온종일 바다거품을 바라보고 놀 수 있는 이들이겠지. 휘어지고 어긋나는 궤적을 몽상하며 헤아릴 수 없는 결을 차르르 넘기는 일에 해지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 ​


이 이야기들은 모두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다. 모든 이야기엔 그림자가 있다고 했던가. 물에 젖은 돌을 주워 손바닥에 올려본다. 파도가 그려놓고 간 무늬들. 무늬가 쌓일수록 돌은 점점 어두워질 것이다. 로봇이 된 바리데기가 존재의 이유를 묻고, 사라지지 않고 떠오르는 물거품이 지상으로 올라가고, 마녀의 심장도 따뜻하다는 것을 아는 손바닥이 있고, 손발톱과 몇백만 원을 내어주고 실존을 파는 것이 현실이며, 엘제는 낭랑하게 웃으며 달빛 아래 새그물을 풀고, 과자집은 영끌의 귀신들이 사는 저주로 변하고, 싫은 사람과는 죽어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나를 위한 정절이며, 기어이 불을 밝히며 어둠의 꿈을 깨뜨리는 아이들이 거리 가득 쏟아져 나오는. 바다거품이 낳은 이야기들은 따뜻하고 차갑고 명랑하고 처절하고. ​


하루종일 귀를 기울여도 홀린듯 들을 수 있는 이야기. 좋은 이야기꾼이란 그가 끌어낸 이야기에 입김을 불어 다시 근사한 바다거품으로 만드는 장인이기에. 거품이 낳은 어린 거품들이 물길을 따라 반짝이며 흘러간다. 다가가 거품에 눈을 맞추니 빛의 난반사. 거품을 안고 주저앉는다. 나의 응시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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