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
진짜 공포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 혹은 부족한 것은
공포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선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
그리고 문학이 할 수 있는 좋은 일 중 하나는
타인의 얼굴에 표정과 온도를 입혀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니 '희망'이란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 있는 사람들이 발명해 내는 것인지도 모르리라.
<잊기 좋은 이름 - 단편 '물속 골리앗' 작가 노트> 중
책을 덮으며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아주 오래전, 정말 전생처럼 느껴지던 어느 휴일 오후, 안방에 틀어놓은 가요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콩나물을 다듬는 젊은 외할머니 옆에 앉아있는 어린 여자아이. 그 여자아이의 '그때 그 순간'은 사실 평화롭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의 클러스터 속 얼어붙은 시간의 단면을 들여다보는 여자에겐 그 시간이 더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여자 외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늙어 거슬거리는 살갗이나 아무것도 맺히지 않는 투명한 동공이라도 이제는 만져볼 수 없다. 여자의 기억 속에 영원히 박제된 순간이 되어버렸다. 여자는 왜 사람들이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지 알 것만 같다. 시간에 녹아 부스러지는 육체를 벗고 어느 정서에 붙박히고 싶은 마음.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그립다.
밝고 명랑한 문장으로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삶의 국면들을 포착해 소설로 꾸려온 작가의 산문은 역시나 정답다. 자궁에 맺히기 전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간까지 살뜰하게 찾아가 귀 기울이고 어루만지고 기어이 어둠 속에서 저예요, 저예요, 손을 든다. 한 인간이 몸을 얻고 영혼을 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인간의 시간이 흘러들어오는가. 작가는 기억나지 않는 어느 시간까지 거슬러올라 캄캄한 저곳을 향해 입을 연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눈부신 순간을 기록한다.
우리에게 문학은 모두 다른 의미다. 그러나 하나 겹치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의 문학은 '인간의 일'이라는 것. 사람을 손바닥에 올리고 가만히 손가락을 오므리면 삶이 되는 것처럼. 작가는 종이 위에 인간을 세우고 한없이 불완전하고 더없이 실패하는 언어로 둘러안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학은 언제나 실패하고 불통하며 그러므로 아름답다.
작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르고 동료 작가들을 부르고 나아가 동시대의 이름들을 부른다. 망루에 오른 이름, 차가운 바다에 갇힌 이름, 편견과 혐오로 얼룩진 이름을. 어느 밤의 입맞춤이 잉태한 손으로 가만히 감싸올려 품에 안는다. 마치 삶이란 그렇게 윤이 도는 것은 아니고 때때로 손톱이 아리는 순간일지 몰라도 반드시 밥 냄새 그윽한 저녁은 온다고 말하는 것처럼. 무감한 얼굴 대신 손가락으로 서툴게 그린 표정을 보여준다. 그것이 문학이 주는 '희망'이라고. 세계는 난폭하고 차가울지 몰라도 재를 뒤집어 불씨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거라고.
나는 이 선의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