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에는 달과 지구 사이의 시공간 연속체가 뒤틀려. 내가 우주 알일 때에는 그 뒤틀림을 이용해서 지구에 왔어. 뒤틀린 시공간 터널을 타고 내리는 달빛에는 이상한 힘이 생겨. 잘라진 걸 붙이고, 끊어진 걸 잇게 되지.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고통을 멈추게 해줘.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에게 물었다. 불행하게도 우주 알의 선택을 받지 못한, 단방향 시공간에 갇힌 인간의 몸이라 나의 사고도 유연하지 못했다. 내가 남자라면, 내가 아주머니라면, 내가 여자라면. 나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여자에 이입해 - 여자의 패턴이 되어 - 나는 남자에게 화가 났다. 하루를 더 사랑하고 최악으로 헤어지는 루트를 택한 것은 여자이지만, 최악의 최악을 막기 위해 여자의 눈을 가리고 살금살금 뒷걸음친 것을 알지만, 그래도 화가 났다. 만약 가로등 불빛 아래 함께 떨리는 칼날을 목격했다면 여자는 어떻게 했을까.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은 여자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화가 난 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결말에 대한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남자에게는 우주 알이 깃들어 있으니 그는 모든 미래를 읽어 그 밤 그 공원에 도달했다. 그 결론은 피할 수 없고 바뀔 수 없는 거라고 한다. (그렇다고 치자) 그는 모든 미래를 읽어 서툴게 휘두르는 칼 아래 도착했다. 여자를 만나 사랑하는 기쁨조차 잃지 않았다. 여자에겐 방 세 개짜리 아파트와 평생 되물어야 할 질문 하나를 남기고 남자는 자기 나름의 정의를 실현했다.
남자에 이입해 - 남자의 패턴이 되어 - 나는 담담하게 수긍했다. 우주 알의 힘이 아니더라도 이건 바뀔 수 없는 미래일지도 모른다. 그 일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였을지라도 남자가 저지른 일은 멈추지 않는 메아리가 되어 이 우주에 울려 퍼진다. 남자가 양손에 상처를 입으며 휘둘렀던 칼은 아마 세상이 남자에게 관대했고 아주머니가 조금 더 건강한 사람이었더라도 결국 남자에게 되돌아왔을 것이다. 남자가 멈출 수 있는 시공간은 결국 그 공원의 가로등 불빛 아래뿐일 것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남자는 누군가를 구원했다. 그것이 자위에 가까운 일일지라도.
아주머니에 이입해 - 아주머니의 패턴이 되어 - 나는 줄곧 아팠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는 인간의 단말마가 악-!악-!악-!악-!악-! 계속 귀를 찔렀다. 영훈을 위한 것이었을까. 치명상을 입은 짐승은 스스로를 돌보는 일 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살기 위해 혀를 내밀어 닿지 않는 상처를 핥는 몸부림 속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아주머니의 패턴이 몸에 남아 저릿저릿 진저리를 쳤다.
그 밤은 그믐이었다. 고통을 멈추는 우주의 패턴. 고통은 멈추었는가. 남자는 단방향 연속체의 한정된 육체를 버렸다. 아주머니는 상냥한 거짓말에 구원받았다. 여자에겐 대답 없는 질문이 남았다. 천천히 여자는 되묻고 거절하고 다시 묻고 어느 날 석연찮은 표정으로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것이 대답이 되진 않겠지만. 고통이 멈추는 속도는 저마다 다를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