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지 소설집, <사랑,입니까>

by 별이언니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아 다시 그날이 옵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이 죄가 되던 그 시절에 우린 모두 죽은 듯이 살았습니다.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서로를 경계하고 눈치를 봤지요.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예의를 지키는 일이란 그렇게 자연스러운 이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부서진 시간을 바라보며 똑같이 자신의 시간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마음 놓고 아파할 수 있도록 시간을 굴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이 노엽게 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누구도 아픈 기억의 나이테를 그리지 않아도 되게 말이지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중





유기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뭘까. 육체를 보존하고 세포 활동을 존속할 수 있는 충분한 영양과 수면 정도일까. 물질적인 측면에서 고찰하자면 그걸로 최소한의 조건은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걸로 충분할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늘에 뿌리를 내린 식물이 한 뼘 앞 햇빛으로 몸을 늘리는 것은 광합성을 해야 하는 식물의 생명 보전에 대한 기본욕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타는듯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입술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매일 음악을 듣고 자란 식물이 동일한 생육조건에서 자란 다른 식물보다 풍성하게 자랐다는 리포트가 있다. 귓바퀴를 만져본다. 소리를 모으는 외부기관이 없는 식물은 어떻게 음악을 들었을까. 듣지 않고 온몸을 열어 흡수했을까. 손을 뻗어 강아지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는다. 손가락을 따라 기분 좋게 휘어지는 뼈와 근육에서 온기가 전해진다. 마음이 놓인다. 나는 지금 사랑하고 있다, 이 작은 생명을. 나는 지금 사랑받고 있다, 이 순수한 영혼에게서.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말라죽을 것이다. ​


사랑,입니까라고 묻는 이야기들은 그러므로 사랑을 고한다. 연인을, 가족을, 친구와, 동료를, 집어삼키듯, 후회하고, 복수하고, 갈망하고, 도망치고, 사과하고, 되돌아가고, 손을 잡고, 손을 놓치고, 끝끝내 부둥켜안고. 우리를 파괴한 것이 사랑이었듯 우리를 구원하는 것 또한 사랑이냐며 묻는다. ​


한 미술이론가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을 해설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비너스와 큐피드의 농염한 모습의 배경으로 사랑의 천변만화가 흘러간다. 병이 된 사랑, 미약과 독극물을 양손에 든 사랑, 사랑의 바닥엔 썩은 물이 흐르고 사랑이 태운 몸과 영은 향기롭게 뒤틀린다. 그리고 무서운 시간이 흘러간다. 피어난 사랑은 이윽고 시든다. 머물렀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눈이 짓무르는 이도 있지만 새로운 계절을 불러오는 마음도 있다. 작가는 불가역적인 사랑을 바라본다. 한 줌의 볕을 향해 나아가는 식물의 궤적을 지켜보듯이. 그가 입을 연다. 사랑,입니까 - ​


지금 그가 머문 곳은 갈망에 찢기는 마음일까, 바라고 향하는 마음일까. 사랑,입니까 -라고 묻는 우리는 모두 다른 답을 내어놓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사랑이란 것이겠지만.​


작가는 순연한 사람인지라 살리고 구원하는 사랑을 데려온다. 화분을 들어 햇볕 가운데 내려놓는다. 말라죽지 않도록, 충만하도록. 온몸을 열어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상처마저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눈물로 뒤틀린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임을 잊지 않도록. 음 - 입술을 열어 허밍한다. 나는 지금 사랑하고 있나요. 나는 지금 사랑받고 있나요. ​


그렇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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