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미니픽션, 로렘 입숨의 책

by 별이언니

투명하게 살아온 나는 그중 어느 것이 진짜 얼굴인지 알지 못하니, 사람들은 저마다 못과 망치와 펜치와 스테이플러와 실과 바늘을 들고 내 얼굴을 조립해 줍니다. 내 얼굴을 깁고 때운 이음매 위로 빛, 몽환, 동화, 날카로움, 부드러움 같은 필터를 씌우고 보정합니다. 그리고 안심합니다. 무엇이든 자신들이 볼 수 있는, 용납할 수 있는 얼굴이 되었으니까요. 그들은 나와 부딪치지 않을 수 있는 안전망을 마련했고, 최소한 부주의로 인해 본의 아니게 나를 해쳤다는 혐의에서는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누더기 얼굴> 중




재치만 있다고 해서 이야기가 성립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신벌 같은 언어를 휘두르며 무거운 망치로 정수리를 내리치는 이야기를 누가 읽겠는가. 좋은 이야기는 잘 읽히는 이야기고, 잘 읽고 난 다음에 계속 마음에 떠오르는 이야기다. 길을 걷다가도 잠깐 멈춰 골똘해지는 것. 그런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작가는 흔치 않다. 그런 이야기가 모여 있는 책을 만나는 것도 그렇고.​


그런 의미에서 행운이다. 묵지근한 통증이 왼팔을 휘감는 토요일, 폐허 같은 시간을 맨발로 걸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유려한 바람이 불 줄이야. 작가가 문을 열고 보여주는 세계는 하나같이 난장판인데 돌아보면 그게 내 세상이다. 좋은 종이로 만든 초대장을 손에 들고 우주의 계단을 올라 미로처럼 얽힌 방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그럼 거기 거울 미로처럼 내가 있다. 기어코 얼굴이 없어져 버린, 내가 있다.

인간만이 특별하고 우월한 종인 양 으스대며 살아가지만 사실 우리는 쥐의 아파트에 세 들어 사는 것일지도 모르고, 사전에서 단어 하나만 지워도 지옥이 되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죽어서 살과 피를 내어주면 괴물 같은 꽃이나 피우는 존재들이다. 투명한 존재가 거기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멋대로의 얼굴을 씌우고 혐오하는 자들이다.

작가는 인간의 추악함을 위트 있는 시공간에 옮겨 심는다. 마치 어떤 꽃이 피어날지 보려는 것처럼. 마치 거기 투명한 육체가 자라나길 간절히 기도하는 것처럼. 입에 발린 말이나 거짓 희망을 퍼뜨리는 대신. 바라본다. 고발자도 아니며 그렇다고 선지자도 아닌, 그저 작가일 뿐이기에. 어떤 문장도 걸맞지 않아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다고 피로한 얼굴을 비비며.

무릎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나 문을 닫고 나온다. 쓸쓸한 등을 얼핏 본 듯도 하다. 끝없이 펼쳐진. 숨을 내쉰다. 단말마 대신, 기도 대신, 한숨을 쉰다. 단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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