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백 일의 밤 백 편의 시

by 별이언니

북해도에 간 적이 있다. 눈 내리는 북해도. 폭설에 갇혀 잠시 동안 이상한 아름다움에 빠졌다. 폭설 안에서 사진을 찍었다. 온통 백색의 입자가 화면 가득 찍혔다. 무엇을 찍었는지 알 수 없었다. 북해도까지 들고 온 모든 슬픔이 백색의 입자로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눈 내리는 밤, 북해도의 호텔 창문 안쪽에서 천천히 더께가 두꺼워지는 내 슬픔의 잔영을 바라보았다.


<75일 밤 : 미야자야 겐지 '삿포로 시' >




겨울이 오면 삿포로에 갈 거예요. 상기된 표정으로 누군가 말했다. 그녀 뒤로 캄캄한 도시가 흘러가고 있었다. 얼핏 눈송이가 스치는 듯도 보였다. 한밤중에 사무실에 갇혀 손가락이 붓도록 키보드를 치면서 우리는 천천히 열화하고 있었다. 삿포로에 내리는 눈송이가 내가 될지도 몰랐다. 이대로 녹아 대기에 스미거나 부스스 먼지로 흩어지거나.

백 일의 밤 동안 백 편의 시를 듣는다. 혓바닥 위에 올려놓고 녹인다. 푸르거나 보랏빛이거나. 시의 온도와 질감에 따라 혀의 색이 변한다. 백 편의 시를 듣는 동안 백 곡의 노래를 한다. 백 마디의 고백을 하고 백 송이의 장미를 꺾는다. 백 번 무릎을 꿇고 백 대 벽을 치고 백 방울의 눈물을 흘리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삿포로 시에 내리는 눈송이가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 손을 펼쳐 우리를 받고 녹아내리는 우리를 눈에 담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슬픔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밤 우리는 누군가의 시가 될지도 모른다. 앞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에 갇혀 백 일의 밤을 보내야 할지도. 난폭한 왕인 내가 나를 죽이기 전에 백 편의 시를 읽자. 눈을 뜨면 봄이 돌아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