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계되는 꿈들 앞에서, 살아 있는 나는 모든 나의 서문에 불과하다.
<교실> 중
물리학자에 따르면 시간은 우주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공간은 어떨까. 좌표를 어떻게 삼느냐에 따라 이것도 다양한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평범한 우리는 물리학의 원칙에 속할지언정 이해하지는 못하니 인간의 개념으로 풀어보도록 하자.
일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은 어찌 보면 없는 듯도 하다. 내가 생각하는 시간은 파편화된 기억들이니. 아주 멀리 떠나온 시간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1파운드의 가슴살을 도려내기도 하고 가본 적 없는 시간의 풍경이 어렴풋하게 만져지기도 한다. 거칠게 좌표로 규정하면 공간은 공간이지만, 거기에 시간의 파편 하나를 꽂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곳은 단 한 사람에게만 열리는 비경, 장소가 된다.
시간은 우주의 차원 문을 열고 불쑥 튀어나오지만 장소는 마음을 먹으면 돌아갈 수 있다. 물론 수몰이 되거나 자본에 파묻힐 수도 있지만 운이 좋다면 조금 낡고 달라질 뿐 거기 그대로 있기도 한다. 시간과 공간이 만난 장소는 특별한 전환점이 된다. 거기 나의 영혼이 머물길 바랐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걸 자식과 손자에게 내내 들려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바꾸어 부르고 어떤 사람은 카메라를 들고 기록하기도 한다. 그리고 작가는 글을 쓴다. 미확정의 언어를 데려와 문을 여는 순간 장소는 유일무이한 좌표가 되고 전 우주에서 실종된 공간이 된다. 개인의 영토에 부속되어 우주의 원칙을 벗어난 곳. 작가는 그곳에 꽂힌 시간의 파편이 영원히 상영하는 기억을 본다. 무릎을 안고 멍하니.
그러나 장소가 빛나는 이유는 이윽고 그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문을 열고 도로 나오기 때문. 영원한 실종, 망각으로의 도피를 원하지 않기 때문. 시간이 난반사하는 장소의 빛 하나를 품고 문을 열고 나서면 길은 막막하고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나아간다. 모든 인간은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겨울, 작가의 작업실에서 마셨던 차 한 잔을 기억한다. 차는 따뜻하고 향긋했지만 허름한 집의 벽을 뒤흔드는 바람은 매서웠다. 그곳에 내가 꽂아둔 시간의 파편은 푸르게 돋아나는 물빛. 오랜만에 나도 한 장소를 열고 들어가 황홀하게 난반사하는 시간의 빛을 바라본다. 그리운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