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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임 Sep 10. 2023

마거릿 애트우드, 눈먼 암살자

사진은 행복에 관한 것이고,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행복이란 유리벽으로 보호된 정원이다. 그곳으로는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다. 낙원에는 이야기가 없다. 그곳에는 여로가 없기 때문이다. 상실과 후회와 비참함과 열망이 굴곡진 길을 따라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눈먼 암살자> 중




비밀은 어디에 숨겨지는가. 한때 나는 계단을 의심했다. 매일 아침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길, 높은 곳에 있는 집들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있었다. 맑은 날이면 햇빛에 흐려지고 비가 내리면 어둡고 선명했다. 계단을 올라가는 눈부신 종아리를 본 날, 나는 계단 아래 숨겨진 온갖 것들을 생각했다. 찢어진 편지, 숨긴 일기장, 피 묻은 이빨, 부서진 갈비뼈, 침 냄새가 날아간 젓가락, 누군가의 눈물이 돌에 스미고 계단의 틈바구니는 모든 것들을 기억한다고. 매일매일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바닥과 발목과 종아리와 허벅지와 터질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의 감촉을. 누군가의 침실로 이어지는 계단이야말로 고의로 잃어버린 것들의 보관소가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에 따르면 계단이야말로 이야기다. 비밀을 폭로하기 위해 혹은 비밀을 은닉하기 위해 온갖 종이에 미칠듯한 집념으로 써 내려간 이야기. 사랑이라는 흉흉한 환상에 홀린 먼 행성의 이야기. 하나의 뿌리에서 태어난 두 줄기의 꽃에 대한 고백. 자매는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의심했으며 서로를 질투했고 끝끝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벌을 받는 자와 벌을 주는 자, 모든 것을 폭로하는 자와 모든 것을 감추는 자.

금발과 푸른 눈은 일조량이 적은 곳에서 살아남은 자의 유전형질이 이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불안에 떨며 옮겨 다니던 방들처럼 어두운 땅에서 무엇보다 환하게. 그렇게 아름다운 것은 대부분 덧없이 스러지기도 하지만,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였기에 이야기는 이어진다. 모든 것을 기록하는 왼손으로. 잘려서 보이지 않는 왼손으로. 정원의 벽을 찢고 도망친, 따뜻하고 강인한 검은 머리카락의 생존자에게. 이야기처럼 삶도 결국 이어지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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