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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임 Sep 13. 2023

기욤 뮈소,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

아니, 당신은 연관이 있다는 걸 알아. 당신과 나는 같은 부류니까.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그걸 알아차렸어. 우리는 삶을 견딜 수 없었지. 어디를 가든 우리는 탈출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야 했어. 진실 때문에 죽지 않으려면 그래야 했으니까. 우리는 임시방편에 의존하지 않고는 실존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 당신의 임시방편은 글쓰기와 아버지에게 들려주던 모든 거짓말이었겠지. 나에게는 놀이가 그 역할을 해주었어. 놀이를 통해 수많은 신분으로 살아본다거나 타인을 조종해 보는 현기증을 느껴볼 수 있었으니까. 우리는 진짜 삶을 산 게 아니야. 우리가 만들어낸 '가상현실' 속에서 살았을 뿐이야. 당신은 '가상현실'이라는 용어가 연극에 대해 말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는 걸 알아?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 중



사건을 추적하고 진실을 찾아가는 주인공 형사마저 마지막 살인 현장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휴대전화 속보로 그의 피해자를 목격하는 지금 여기라면 이미 '가상현실'이 아닐까. 삶을 견딜 수 없어서 점점 짧고 자극적인 정보들만 단편적으로 흡수하고 놀이에 심취하고 그것도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유행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쟁반 위의 구슬처럼 핑-핑 어지럽고.

고대 이집트인들은 인간의 정수가 심장에 깃들어 있다고 여겨 미라 안에도 심장은 남겨두었다. 중세인들은 피에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피를 마시고 영생을 사는 괴물을 상상했다. 현대 의학이 발전하면서 어떤 과학자들은 인간의 정수가 뇌에 있다고 믿는다. 나는 발목에 있다고 생각한다. 땅을 단단하게 디디고 있는 실감, 발을 옮겨 어디론가 향한다는 실감, 나의 몸이 여기 있다는 실감, 중력의 투명한 손을 맞잡고 나를 우주 미아의 신세에서 매 순간 구해내고 있는 갸륵한 발목에.

아마도 이 가상현실주의자들은 육체를 신봉할 것이다. 술에 마취되고 칼에 신음하고 피와 땀을 뿜어내는 육체, 쾌락과 고통을 넘나드는 육체를 바치고 실감을 얻는 자들.  소설 속 디오니소스의 형제자매들은 그로테스크하고 잔인했지만 현실은 늘 소설을 앞서간다. 지금도 타인의 비명을 들으며 황홀경에 드는 자들이 있을 테니.

공들여 만든 현실이라는 무대를 위해 써 내려간 정교한 각본을 실행하기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은 과감한 연출이라면 희대의 형사든 죽음에 사로잡힌 예술가든 모두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일 뿐이다. 그러나 참 우습지 않은가. 매일 매 순간 희미해지고 가벼워지는 실감을 고민하며 하루를 명상할 짬도 없는 자가 무슨 자유를 누리겠는가. 그 역시 스스로의 광기에 사로잡힌 광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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