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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임 Sep 24. 2023

오르한 파묵, 페스트의 밤

아무도 잊지 않았지만 어쩌면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 같던 소리들이 도시에서 하나둘 다시 들리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이 옛 삶이 돌아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대부분이 믿지 못했다. 가장 큰 기쁨은 말발굽 소리, 마차 바퀴 소리, 종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이었다. 전염병으로 죽은 마부들을 대신해 그들처럼 가장 가파른 오르막길도 말들과 다정하고 부드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이따금 채찍질을 하며 어렵지 않게 올라가는 새 마부들이 일하기 시작했다. 파키제 술탄은 마부들이 입술을 오므리며 내는 "워이, 워이. 이랴 이랴. " 같은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행복해지는지 언니에게 즐겁게 썼다.



여름이 끝나자 우리의 생활에서도 전염병이 사라졌다. 공식적인 확진자 집계는 8월 31일로 멈췄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벗은 얼굴이 낯설어 눈을 가늘게 뜨고 인사를 나누었다. 끝날 것이라고 여겼지만 정말 방역이 끝난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마스크를 사기 위해 정해진 요일에 약국에 줄을 서고 창문을 여는 것조차 두려워 열이 나는 이마를 벽에 기대고 바깥의 풍경을 그리워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생활의 풍경은 빠르게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민게르 섬과는 달리 우리의 전염병은 드러나지 않을 뿐 아직도 진행형이다. 다행인 것은 병과 싸우는 인간들의 무기가 그 시절보다 발달해 치명률이 점차 낮아졌다는 것이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데다가 바다의 외곽은 유럽 열강의 전함들로 에워싸인 민게르섬의 밤에 비하면.​


죽은 사람들과 죽어가는 사람들과 필사적으로 죽음에 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벽과 지붕 뒤에 숨어 있어 마을은 고요했다. 폐허와도 같은 죽음이 섬을 장악했다. 열과 구토, 경련과 오한, 고름과 섬망이 찾아오면 지독한 고통 속에서 헛소리를 하며 사나흘 만에 숨을 거두는, 요란한 병이 폭풍이 되어 섬을 휩쓸고 있는데도. 죽음은 눅진하고 무겁고 고적했다. 쿠데타와 혁명으로 바뀐 지도자들이 방탄 마차를 타고 순찰을 나가 텅 빈 마을을 보며 느꼈던 감정은 체념과 공포와 그럼에도 의지와 나름의 신념과 투쟁과 그리고 죽음으로의 경외감이 아닐까. 그들이 싸운 것은 다만 병만은 아니었다. 사방에 죽음이 흘러넘치자 그들은 열렬히 사랑을 했다. 연인의 품에서 위안을 얻고 아름다운 민게르어를 사모했다. 무지막지한 병의 손아귀에 갇혀서도 종교와 파벌을 포기하지 않았다. 죽음이 그들을 더욱더 갈라놓았다. 원래 지독한 사랑은 이기적이라 했던가. 처음에는 병이 섬을 덮쳤고 그러자 병균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마음이 뒤따라왔다. 공평하고 잔인한 죽음은 차례차례 그들을 데려갔다. 병으로 죽고, 교수대에서 죽고, 독살당하거나 총에 맞기도 했다. 병이 섬의 운명을 조금 앞당기긴 했겠지만 분명 어느 시절 민게르섬은 죽음의 육체였다. 숨을 쉬고 손을 내밀면 죽음의 살갗이 만져질 정도로.


그러니 병은 어느 날 쥐 떼와 함께 사라질밖에. 방역조치가 물론 가장 큰 몫을 했겠지만 여전히 섬은 통제되지 못했을 테니. 죽음은 섬에서 한동안 머물다 홀연 사라졌다. 죽음이 사라진 자리로 인간의 생활이 다시 깃들었다. 파티제 술탄과 부마 누리가 거짓말처럼 다시 배를 타고 떠났듯. 소쿠리에 거둔 목숨을 헤아리지도 않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죽음이 떠나고 섬은 다시 인간들의 것이 되었다. 절실한 것들이 부풀렀다가도 금방 사라지고 커다란 목소리도 인파에 묻혀 들리지 않는, 복잡하고 수상한 삶이 시끌벅적.

얼마나 다행인가. 죽음의 독재가 끝났다는 것이. 죽음이 가져온 질서정연함이, 불길한 고독이, 중독적인 고요가 사라진 것이. 삶은 어리석고 어수선하고 제멋대로 날뛰고 시끄럽지만 그러기에 아름답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무너지고 사라지는 건물들이, 잊히고 생겨나는 언어가, 증조할머니에게서 할머니로 다시 어머니에게 그리고 딸에게 전해지는 이야기야말로

이 무상함이야말로 지극히 인간적이다. 안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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