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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임 May 24. 2024

24.5.24

언젠가 동굴에 갔을 때 주저앉아 엉엉 울었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혹시 전생에 동굴에서 죽은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돌아나올 수 없는 동굴 투어 특성상 벌벌 떨며 출구만을 향해 나아갔어요. 


동굴이 엄습했어요. 본연의 고요와 자욱한 습기, 조명이 닿지 않는 구석마다 스물거리는 천연의 어둠. 그건 대자연이었어요. 그건 세계였어요. 나에겐 아무런 보호막이 없었어요. 


세계에 무방비로 내팽겨쳐진 인간이란 이렇게 무력하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그게 아니야, 숨을 곳 하나 없는 이 평탄하고 공평한 세계를 실감하는 것이 내겐 공포라서 그래, 라는 깨달음이 뒤이어.


한적한 카페에 앉아 저멀리 나무에서 우는 새소리를 듣는 것은 기뻐요. 보이지 않는 새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죠. 그러나 내가 정글 한복판에서 그 새를 만난다면 두려울 거에요. 새와 나 사이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것이 자연이 아니더라도 그래요. 내 앞의 누군가 갑자기 날것의 감정을 보일 때, 도망치고 싶어요. 그가 쓰고 있던 가면이 스르륵 흘러내려 숨겨둔 표정을 목격할 때 눈을 감고 싶죠. 아주 얇고 투명하더라도 막이 필요해요. 나를 격리시켜줄 단 하나의 막이.


그래서 나는 폭풍을 사랑하죠. 폭풍 속의 리어왕을 사랑하죠. 그는 내가 무서워서 닿을 수 없는 풍경 속에 있어요. 폭풍 속을 배회하며 참회하고 울부짖죠. 그의 날것의 감정에, 그의 본연의 표정에 세계가 반응해요. 그의 슬픔만큼 비가 쏟아지고 그의 분노만큼 바람이 불고 그의 격정에 세계가 뒤흔들리죠. 리어왕은 폭풍이 되어요. 하나가 돼죠. 


쉘터에 들어가 숨고 싶은 날, 리어왕을 생각해요. 폭풍이 된 리어왕을. 공포와 슬픔에 미쳐버린 왕을. 나를 감싸고 있는 얇고 투명한 막에 얼굴을 기대요. 차마 나의 손톱으로 찢어발길 수 없는 나의 태막. 수많은 나의 표정을 품고 있는 나의 영혼. 질기고 슬프고 아픈 것.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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