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목련이 피어서 꽃잎 주워 차로 마실까, 옷깃을 올리고 산에 올랐다
바람이 연두를 끌고 오니 스윽, 꽃잎이 떨어졌다
바구니 들고 오르니 그리 불던 바람도 잠잠
그늘이 깊어 오므린 봉오리만 가득,
산목련 바라보고 오른 산이 여러 고개인데 가는 곳마다 무덤이 있었다
아직도 상중인지
목련꽃에 부처님이 계신 것인지
이 험한 세상 불 밝힌 곳이 부처님 품 안이라면 괜찮겠다고
내 그림자 뒤에 두고 산길 밟았다
<산목련 같은 봄에 오르다>
꼭 설이 아니더라도 어떤 절기를 앞둔 날은 마치 무엇이 끝나는 느낌이 든다.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는 날이 많다. 마치 알몸으로 세상에 새로 태어난 것처럼, 놀랍고 무서워.
유명한 건축가가 말하기를 현대인은 죽음을 생활의 터전에서 밀어내 버려서 무언가 변해버렸다고 한다. 고대에는 무덤이 가장 크고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신전이나 사원이 되어 무덤에 기도하는 일도 잦았다. 죽는다는 일은 그 시절에도 무섭고 힘든 일이었을지 모르나 적어도 지금처럼 완전히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는 않았을 테다. 죽음을 터부시하는 태도는 우리에게 정당한 애도나 슬픔을 허락하지 않는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기묘한 행동강령만이 남아 마음이 망가진 채로 수십 년 살다가 자신도 사라진다.
화장하여 뼛가루 한 줌 항아리에 넣어 보관하는 요즘과 달리 마을 앞산 뒷산 쑥 캐러 밤 주우러 오르면 지천에 깔린 무덤에 잠시 등을 기대던 적도 있었을 텐데. 여기는 누구네 무덤이고 여기는 누구 무덤이고 문패 하나 없이 비슷비슷하게 생긴 무덤을 두고도 환하게 살았을 적 이름을 불러주며 그 이력을 한참 읊어주던 이웃도 있었고. 지금은 모두 모르는 무덤. 무덤을 보면 멀리 돌아가는 마음들.
그래도 나무들은 기억하겠지. 뿌리가 슬쩍 닿으면 물기 한 점 남지 않은 귀신들이 어허이, 하고 손을 젓기도 했다는걸. 먼저 보내고 나중 따라갈 이들이 무덤에 돋은 풀을 뽑으며 이름을 부르면 귀를 쫑긋 세우겠지. 산에 피는 꽃들이 멀리서도 환한 것은 아마도 그래서일 거야. 기억으로 내림하는 이름들을 담았다가 꽃잎을 열어 세상에 보여주니까.
그래서 명절 전 날 무언가 하나 닫히고 끝나는 마음이 좋다. 죽어야 다시 태어나니까. 수고했다며 낡고 헌 것을 벗어 고이 개켜두고 새로 빨고 다린 시간을 걸치는 일. 언젠가 내 집 문을 두드리고 찾아올 죽음도 그렇다. 오래 기다렸어, 열심히 살았어, 하며 악수하고 포옹하며 손잡고 가는 날. 내 인생의 어느 절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