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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임 Oct 05. 2024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다들 주저하지 마시라. (나는 지금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리던 나머지 다른 승객들을 떠올리는 중이다.) 어서 일지를 꺼내고 기록하시라! 실제로 우리 중에 뭔가를 기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신발에서 시선을 들어 올리고 서로 바라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 기록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기에. 우리는 문자와 이니셜을 서로 교환하고, 종이 위에 서로를 불멸로 남기고, 서로를 플라스티네이션 처리하고, 문장의 포름알데히드 속에 서로를 담글 것이다. 





어째서 숨이 붙은 모든 것들은 노화를 지나 죽음에 이르는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는 없다. 누가 알겠는가. 생명의 메커니즘을, 살아있음의 철학을. 다만 이렇게 어림짐작할 뿐. 우리가 세계에 감응하는 것은 결국 육체를 매개로 하기에 유한한 시간의 흐름을 감각하는 것 또한 육체이기 때문이라고. 손이 없다면 나의 강아지를 어루만질 수 없다. 코가 없다면 쌀쌀한 공기의 냄새를 모른다. 부둥켜안을 두 팔이 없다면 사랑도 우주의 희미한 빛이나 다름없을 테다. 두 발로 땅을 밟고 다져 길을 만들고 사람의 길을 따라 다시 사람이 오며 길의 사방으로 마을이 생긴다. 인간은 길을 따라 마을에서 마을로 떠돈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에서 흘러나와 첫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 줄곧 변하는 그의 육체처럼. 느리든 빠르든 멈추지 않는다. 멈춤은 곧 부패와 타락이다. 그래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육체를 포름알데히드에 넣고 사람들은 숨을 죽이는 지도. 방부처리한 육체는 기이한 시간을 지나가는 중이다. 


우리는 모두 떠돌고 있다. 목적지에 다다랐다고 믿으며 방에 짐을 풀고 베개에 머리를 내려놓으면 불안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래서 여행은 지금 여기 내가 있다, 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인지도. 


아름다웠던 배우는 발이 없는 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잠시 허공을 날았다.


짧으면 한 문단, 길면 열두어 페이지의 글들이 지도처럼 펼쳐져 있었다. 나는 여행지에서 자주 불안하고, 자주 슬프다. 여행지에선 감정이 훨씬 생생하게 느껴진다. 눈물을 흘리기 위해 여행지의 밤으로 떠나는지도 모른다. 나에겐 소재와 크기가 다른 여행 가방이 여럿 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나를 지나가는 시간을 느낀다. 시시각각 죽어가는 세포와 다시 만들어지는 핏방울들을. 우리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기에 해부를 하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간 길을 들여다보고 기록하는 일. 그건 시간의 지도를 만드는 일. 


방랑의 사전적 의미는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님"이다. 목적지가 없는 방랑이 결국 우리 삶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누가 알까. 육체를 지나가고 있는 시간의 목적지를.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지금 여기 내가 있다는 사실일 뿐. 그 얇고 약한 사실을 움켜쥐고 게이트 앞에서 일지를 꺼낸다. 저 문이 열리면 또 떠나야 한다. 정처 없는 움직임이 다시 시작된다. 그러니 여기 문장의 포름알데히드에 지금 여기의 나를 담근다. 휘발되지 않는 시간을, 흘러가지 않고 멈추었으나 부패되지 않는 기적을. 그 불경함과 영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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