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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여름을 지나가다>

by 별이언니

가슴을 움켜쥐고 흐느끼는 민에게서 눈을 돌리자 창밖은 여름이었다.

나를 데려가는 문장들이 있다. 사위가 어두워지는, 묘한 기시감 - 묘한 이질감. 소설의 공간은 정교하게 조립된 집과 같아서 나는 손가락 마디로 톡-톡 두들긴 후 귀를 기울이고, 보조키로 현관을 열고 들어가, 화장대에 앉아 낯선 향기를 뿜는 립스틱을 바르고, 침대에 누워 우는 거다. 휘발되는, 30분짜리 인생을, 반복되는 죽음을 전전하면서.

한 남자가, 걸음을 옮기면 사라지는 계단을 올라, 비상계단의 끝까지 올라가, 몸을 던졌다. 여름이었다.

한 청년이, 새벽마다 거실에서 벽을 마주하고 욕을 하는, 얼굴이 비틀린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다가, 주운 지갑 속의 사람이 된다. 주운 지갑 속의 사람의 얼굴 위에 도란을 바르고 눈물을 찍는다. 눈물은 크게 그려도 좋다.

한 여자가, 쇼핑센터 옥상에서, 삐에로 분장을 하고 풍선으로 만든 인형을 나눠준다. 주말이면 아이스크림을 팔고, 기차 소리를 들으며 맥주를 마신다. 밤에, 웅크리고 앉아,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본 적이 있는지. 기차의 창은 더할 나위 없이 환하고, 기차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지나가는데. 그건 옛날 영화에서나 썼다는 환등기를 떠올리게 한다. 전혀 실감할 수 없는 완전한 타인들이 그 빛 속에 덩그러니 앉아서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 나의 여름은 여기 있는데.

민도, 연주도, 수호도, 목수도, 동욱도, 은화할머니도, 종우도, 그리고 계단의 끝에서 빛 속으로 몸을 날린 남자도 이렇게 말했겠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수도 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던 여자는 하지만, 말한다. 언제까지 도망칠건데.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라면, 도망치던 청년은 멈추고, 삶을 향해 - 그런데 무엇이 삶인데 - 비틀거리며 돌아서겠지. 하지만 그녀도 그도 우리도 모두 알고 있다. 도망치는 일, 전전하는 일, 때로는 이것이 이 텅 빈 공허를, 이 자욱한 불안을, 발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도 어딘가로 흘러가는 여름을 견디는 가장 용감한 방법이라는 것을.

민이 깃들었다가 다시 도망쳤던 인생 - 상상속 타인의 삶 - 완전히 부서진 나의 삶에는 차마 누울 곳도 없어서, 등을 붙이고 눈물을 흘릴 곳을 찾아 타인의 방으로, 가구점으로 들어갔다 나온다. 그건 환상이었다고, 꿈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 . 만화가의 애인은 현관 밖에서 오래 말한다. 민이 거주했다고 믿었던 환상은 엄연한 삶이다. 오래된 가구점 - 파산하는 꿈은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릴 때는 먼지 냄새 달콤한 위로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언젠가는 보증금이 모두 사라지고 셔터는 올라간다. 냉혹한 삶은 햇빛 아래 부품 단위로 분리되어 나뒹군다.

쇼핑센터 위 회전목마는 사라진다. 보람연립은 부서진다. 민이 올린 어설픈 제사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민은, 수호는, 연주는 알고 있다. 언젠가 여름이 끝난다는 것을. 이제 문을 닫고 나온 중개 사무소 직원의 칸에서 민이 무너지고 마는 것은, 그녀가 아직 돌아갈 세계를 찾지 못했음인가. 혹은 돌아갔다고 믿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여름은 … 햇빛조차 길 위에서 휘발되는 계절이다. 비가 금방 마르는 계절이다. 모든 것이 온전하게 가라앉지 못하는, 마천루의 시간.

여름의 환상을 모두 끌어올려 가을에는 과일이 익고 곡식이 영근다. 그리고 겨울, 모든 것이 앙상해지는 시간이 온다.

여름의 끝에서 나부끼는 민의 옷자락을 바라보며 나는 운다.

여름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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