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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우 평론집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

by 별이언니

고단한 독서에 대해 생각한다. 텍스트를 헤집고 순연하게 전체를 한 번, 부분을 여러 번 - 거울의 이쪽면에 비춰보고 뒷편에도 대어보고 - 파도처럼 일어나는 온갖 생각들에 일일이 질문을 하면서 계보에 따라 연대에 따라 정리를 해봤다가 흩뜨려도 봤다가

해가 좋은 날, 갑자기 서랍을 뒤집어 엎듯 - 지난한 독서에 대해 생각한다. 그 지난함이, 금방이라도 단내가 날 것 같은 노동으로서의 독서가 그에게 기쁨을 주었을까 생각한다.

그럼 당연하고 말고. 여기 이렇게나 기뻐하면서 쓴 글들이 있지 않은가.

한량 독서가인 나는 그의 고단하고 치열한 독서의 궤적을 따라간다. 내가 잘 모르는 어느 고명한 학자의 인용이 없어서 좋다. 순전히 자신만의 텍스트로 쓴 평론을 읽어본 적이 참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에서부터인가, 작품집 말미에 붙어 있는 해설을 잘 읽지 않게 되었다. 심심하면 불려나오는 서양의 철학가들의 그렇더라가 연발되던지, 혹은 작품집을 누더기처럼 뜯어 다시 기워붙인 것 마냥 인용구가 흘러넘치곤 했기 때문이다. 평론은 고단한 독서에서 출발해서 한 편의 새로운 텍스트로 태어나는 일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한동안 내가 접한 평론들은 '태어나지 못한 텍스트' 들이라서 손을 놓고 있었다.

그래서 이 평론집이 반갑다. 여기엔 침침한 눈을 비비면서 한 줄 한 줄 한 자 한 자 꼼꼼하게 읽고 삼켜 응어리진 결까지 일일이 풀어 다시 엮은 '텍스트'가 있기 때문이다. 노동으로서의 독서가 있고, 기쁨으로 써내려간 글이 있다. 무엇보다 '문학'이라는 것에 대해 끝없이 부르는, 반가운 목소리가 있다.

우리는 쓰는 순간 작가가 되고 읽는 동안은 누구나 독자가 된다.

물론 스치듯 읽는 독서도 있고 스치듯도 읽지 못하는 독서도 있다. 편견으로 얼룩진 독서도 있고 기대가 과한 독서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어떤 '자세'다. 독서의 어떤 '자세'.

그 자세는 물론 사람마다 다르다. 천편일률의 정답을 강요한다면 그건 폭력에 불과하니까. 단정한 결기로 써내려간 그의 글들이 와닿는 것은 그가 어떤 자세를 강요하지 않고 다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그가 이야기하고 내가 동의하는 문학이라는 자유다. 약하고 어둡고 힘든 것들 옆에 자리하는 것이 문학이지만 또한 쉽게 위로하지 않고 쉽게 동화되지 않으며 미학적이고 도덕적인 거리를 견지하면서 세계와 인간을 쓰는 일이 문학이라고.

평론은 어떤 작품의 숨겨진 면을 들춰 보여주기도 하고 전혀 다른 시선의 해석을 보여주기도 한다. 의심하기는 하지만 매도하진 않고, 반가워 하지만 쉽게 상찬하지 않는, 어느 작품에게나 열려 있으면서 동시에 그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마음.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평론이다. '비둘기 걸음으로 다가오는 내일' 을 꿈꾸는 일은 쓰는 자, 읽는 자를 넘어서 '사는 자' -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모든 작품을 읽고 책을 덮으며 그가 생각했던 것은 이 아름다운 '열린 결말'이 이어질 '다음 시작'일 터. 그러니 나도 그의 고단하고 지난한 독서를 다시 기다린다. 온전히 기쁨으로 이어질 그의 노동을 꿈꾼다. 그의 눈이 닿을 작품들을 들뜬 마음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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