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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경 <콜센터>

by 별이언니

주리, 용희, 시현, 형조, 동민. 다섯 명의 친구들이 바다를 보고, 눈앞에 서지 않으면 실감이 나지 않는 바다를 보고, 수영하고 소리지르고 사랑을 고백하고 육탄전을 벌이고, 그리고 기도하고,

- 꿈을 포기하게 해주세요

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그 말에 담긴 마음이 너무 커서 울컥했다. 세상은 허울좋게 말한다. 내일은 꿈꾸는 자에게만 온다고, 그러니 꿈을 꾸라고.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사람의 마음은 강철이 아니다. 진상들의 감정쓰레기통이 되어 한시간에 수십 통의 전화를 받고 화장실 가는 시간, 잠깐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는 시간조차 통제받아야 하는 콜센터를 평생직장으로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겠지만. 누군가의 화받이가 되어 깎여나가는 감정을 견디다 못해 감정 근육을 마비시켜야만 겨우 버틸 수 있는 하루를 보내고 남는 시간에 자기의 꿈을 꾸며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노력이다. 그리고 기적과도 같은 노력의 과정만으로 만족하기에는 삶은 냉정하다.

진상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이브 화려한 탈출을 꿈꾸며 부산까지 내려가지만 '대기업 부장' 이라던 진상 역시 다니던 핸드폰 대리점에서 그날 쫓겨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시현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배달한 피자를 받기 위해 낯선 집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 제일 싫은 동민은 왜 그랬을까. 진상은 저기 너머 추상적인 '진상' 으로 있을 때 나도 여기 겨우 서 있을 수 있다. 매를 맞아 눈이 부은 여자라던가, 실직해 쓰레기같은 감정을 퍼부을 곳이 필요한 중년 가장이라던가, 청결하지 못한 개수대에서 올라오는 냄새 - 다 늘어진 파자마 -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실신해 쓰러질 것만 같은 오후 같은 디테일을 아는 순간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이 청춘들은 그래도 맑고 아름다워서 크리스마스 날 핸드폰 대리점 문을 열고 사과봉지를 두고 가기도 한다. 당장 몇 달 뒤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오늘 지금은 서로 사랑하기로 한다. 아직은 꿈을 꿀 근육이 움직이고 그래서 이 콜센터의 청춘들에겐 매일 달라지는 구름처럼 내일이 온다. 편안해지고 싶어서, 짐승의 아가리같은 세계에 그만 항복하고 싶어서 포기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결국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일견 희망적으로 보인 소설 말미의 그들이 위로이자 소소한 성취일까. 아니면 어느 정도의 타협점일까.

무엇일까, 궁금해하는 것도 사실은 촌스러운 일. 촌스러운 일은 추상적이다. 다만 살아간다, 우리는. 열심히 사는 것도 아니고 포기하고 놓아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 어떤 삶의 순간도 무의미하게 흘러가진 않는다. 숨을 쉬고 마시고 다시 내뱉는다. 걷고 먹고 찡그리고 울고 웃기도 한다. 감정을 쓰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사랑한다. 그렇게 다만 살아간다. 살아감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지금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주리가 1년 후에도 콜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형조가 시험에 실패하고 동민의 푸드트럭이 망한다 해도, 용희가 창업하지 못한다 해도, 시현이 사실은 아나운서 시험을 포기한 것이라 해도.

- 꿈을 포기하게 해주세요

그 기도에 담긴 간절한 마음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여길지라도,

살아간다는 일은 계속되고,

살아있는 동안 우리에겐 이기지도 지지도 않는 내일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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