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쇄도시 오랑의 기록을 다시 찾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이 병과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영문도 모르게 슬며시 사라진 병. 도시가 다시 열리고 플랫폼에서는 사람들이 조금은 변한 마음을 감추고 예전의 일상들을 끌어안고. 영원히 되찾지 못할 추억들만 가진 사람들은 쓸쓸하게 집으로 돌아갈지라도. 봄이 오면서 물러난 (것처럼 보이는) 병과의 (일시적) 화해를. 그 몇 장을 다시 읽기 위해 책꽂이를 뒤져 이 책을 꺼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며칠 동안 다시 전세계적으로 2차 대유행이 일어나고 있다.
리외는 말한다. 페스트는 어디에나 있다고, 병균은 사라지지 않고 책, 옷, 오래된 가방의 먼지, 묵은 도시의 포도에 떨어지는 햇빛에 숨어 있다가 어느 날 쥐떼와 함께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타루는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속에 저마다의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고. 그도 그럴 것이 페스트 앞에 무사한 사람이란 없지 않느냐고. 크리스마스날 상점 앞에서 떠나간 아내를 생각하며 울던 그랑은 기적과도 같은 완쾌 후 하염없이 매만지던 문장에서 조금은 벗어났다. 랑베르는 플랫폼에서 아내를 끌어안았지만 그가 그토록 열렬히 안은 것은 이미 페스트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제 그의 열정은 조금은 달라진 온도와 형태로 이어질 것이고, (언젠가는 끊어질지도 모르고) 왕진가방을 들고 환호성이 울려퍼지는 중심가를 가로질러 변두리로 향하는 리외의 소회처럼 인간다운 것들이, 인간의 사랑만으로 보상을 받는 이들이 기쁨을 누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마땅한 치료약도 없고 어디서 옮아왔는지도 모르게 사지를 잠식하고 고열로 사람을 태우는 무서운 병. 도시의 모든 문은 굳게 닫히고 갇힌 사람들은 그저 견딜 뿐이다. 통계는 차갑고 이성적으로 매일 갱신되는 사망률을 알리고 의사들은 아무 효과도 없는 혈청을 놓으며 환자가 기적처럼 일어서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오래, 비이성적인 '생명의 위기'가 지속되면 사람들은 현실로부터 분리된다. 감정이 박리된다. 단상에서 열변을 토하는 신부 앞에서 부스럭거리며 딴청을 피우는 이들처럼. 병과 심지어 병에 걸린 사람들, 그것이 본인이나 가족일지라도, 도 어떤 의미로는 낯설 뿐이다. 바로 내 눈앞에 있는 페스트는 알 수 없는 무엇이다. 알 수 없는 뜨거움을 품고 인간은 살아간다. 학살자나 혹은 희생자로. 폭력을 당하는 자나 혹은 폭력을 휘두르는 자로. 엄청난 의지가 없으면 '감염시키지 않는 자'로 남을 수 없는 엄중한 세계에서 우리는 얼마나 결백한 인간으로 남기 위해 애쓰는가. 타루의 수첩은 그렇게 흔들리다가 페스트의 열 속으로 표류해 사라진다.
이 소설의 서술자가 눈을 주고 매김하여 페이지 위에 올려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이 병을 실존적으로 뚫고간 자들이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맥없이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저녁해가 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만 본 사람들은 아니다. 아니, 오랑의 주민들은 어쩌면 모두가 어떻게든 이 병을 살아내려고 나름의 자구책으로 애썼을테다. 그렇게 애쓴 사람들은 더러 병에 걸려 죽기도 하고, 병에 걸렸다가 살아남기도 하고, 가족을 잃고 유령이 되기도 한다.
고열과 림프절의 부종, 그렁거리는 폐, 딱딱해지는 관절 - 페스트의 모든 제증상, 그리고 육체적인 징후가 없더라도 이 시절 오랑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 오랑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했던 오랑 밖의 모든 사람들에겐 페스트가 자리했다. 아니, 페스트는 인간으로 태어나 다른 인간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두에게 있다. 매순간 우리가 인생에 어떤 의지를 보여주느냐에 따라 페스트는 다른 얼굴을 보여줄 뿐이다.
결국 이것은 실존하는 인간에 대한 기록이다. 병을 기록한다지만 식물도 열정도 영혼도 없는 도시 오랑을 기록했고 그렇게 오랑의 매일을 탕진하며 살던 사람들이 저마다의 페스트와 직면하는 날들을 기록했다. 우리도 지금 실존의 시간을 지나가고 있다. 다시 받아쓴다. '전염시키지 않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의지가 필요하다. 단순히 병에만 국한되는 말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