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그 때 그이와 함께 머물던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보물과도 같은 순간을 지나가는 동안 온전히 품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순간이야말로,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이 삶에 와서 반드시 마주쳐야 할 '어떤 약속' 이라는 것을.
그레구아르는 그렇게 빛나는 순간을 지나온다. 엄두가 나지 않던 책을 읽으며, 운하에서 헤엄을 치며 온몸으로 낭독하는 것을 배우며, 변기 배수관으로 '라디오 수레국화! 여기는 지이이이이옥!'을 외치고, 상냥한 노부인이 지상을 향해 마지막으로 열어놓은 귀에 음악과도 같은 텍스트를 들려주며, 31호실에서 최초의 연인과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그레구아르가 배식판을 들고 이제는 읽을 수 없는 삼천 권의 책과 함께 천천히 침몰하고 있던 피키에 씨의 방문을 두드렸던 순간, 소년의 인생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피키에 씨에게는 글쎄, 이제 막 삶을 시작하려고 하는, 서툴고 말랑말랑한 소년 덕분에 인생의 말미에 여러 빛나는 순간을 얻을 수 있었겠지. 평생 마음 속에 숨겨둔 방을 갖고 있는 부류의 사람답게 그도 죽음의 순간 만나는 천사 말고 지상에 남아있는 어떤 사람에게 고해하듯 고백하듯 그 방에 가둬둔 뜨거웠던 시간들을 들킬 수도 있었을 게다. 노인은 죽어가고 소년은 어른이 된다. 책을 읽는 것은 가장 가까운 타인을 만나는 일, 즉 나 자신을 만나는 일이라고 말하는 책방 할아버지. 그는 그레구아르에게 기회를 하나 열어주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살면서 온전한 기회 하나가 눈앞에 열리는 것을 마주하는 행운은 좀처럼 누릴 수 없다. 그레구아르에게 책을 읽는 기쁨, 책을 낭독하는 기쁨을 알려주고 그 소년이 어엿하게 어깨를 펴고 나는 낭독가라고 말할 수 있도록 등을 밀어주면서 피키에 씨는 행복했을까. 아마 행복했을 거다. 누구보다 책을 사랑했던 자신은 서점 주인으로 살면서 더이상 책에 순결한 기쁨을 갖지 못했지만, 요양원에 들어와 읽지도 못할 책 삼천 권에 둘러싸여 회한과 고독에 집어삼켜지기 직전 비로소 온전한 사랑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레구아르가 들려주는 텍스트들은 그에게 아주 오래전에 쓰고 애써 잊어버린 시들을 다시 불러왔다. 그는 젊은 시절 잃어버린 사랑과 이해받지 못했던 평생을 그가 사랑했던 텍스트들을 들으며 다시 만나고 '회고'라는 형식이 갖는 특장점으로 관조하며 이윽고 이해한다. 너무 뜨겁고 서툴러 덮어놓고 달아나기 바빴던 인생과 비로소 마주한다.
노인이 평생 사랑했던 수도원의 조각상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그레구아르가 걸어가는 동안 피키에씨는 숨을 거둔다. 노인이 들려준 삶의 '은밀한 비밀과 우스꽝스러운 요령'이 소년에게 얼마나 보탬이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레구아르는 평생 돌아보며 미소지을 기억을 얻었다. 그렇게 '책을 읽어주는 소년' 그레구아르는 그의 소년 시절 마지막 낭독을 마치고 스무 살이 된다. 이제 책방 할아버지의 추천이나 부탁 없이 그는 그가 읽을 텍스트들을 스스로 선택할 것이다. 이제 막 펼쳐진 백지의 책 위로 어떤 시가 쓰여질까. 수레국화의 꽃말은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