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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by 별이언니

사상은 과격해야 한다. 날것의 사상이 세상 이치에 맞추느라 어차피 틀어지고 둥글려져 정작 우리네 세상에는 늘 부스러기만 남기 때문에. 그래서 사상은 과격해야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외롭다.

비가 내려 흙탕물로 범람하는 저 강을 따라올라가면 아주 조그맣고 맑은 샘이 있겠지. 골짜기 안쪽 나무가 겹겹 가리고 새들만 인간이 모르는 언어로 돌보는 샘. 그 샘이 인간의 마을로 내려오는 동안 저렇게 몸을 불린다. 저 안에 온갖 생명을 가두고 몸을 뒤튼다.

나는 잠깐 새들이 신비를 벗고 열어준 길을 따라 숲 제일 깊은 곳 한 방울의 샘을 만난 기분이다. 이 맑은 분이 이렇게 잡다한 것들이 들끓는 세속의 강가에서 어떻게 머무셨을까. 내가 먹을 밥그릇에서 서너 숟가락을 기어이 덜어내고 마는 저 청결한 정신은 인간세상의 더러움에 늘 신물이 올라왔을 것이다.

도시에 살지 않았음에도 그렇다. 이웃하던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가, 농촌의 풍경이, 땅을 일궈 먹을 것을 얻는 인간의 이야기가 몇 년도 지나지 않아 바뀌고 뒤틀리고 낯설어지는 것을 저 순연한 마음이 온전히 받아 안았을 리가 없다. 그러니 힘이 들었을 테고, 그러니 집을 찾아오겠다는 지인들의 청을 거절하기도 했을 테고, 추겨올려 죽이지도 깎아내려 죽이지도 않으려고 마감이 거친 말들을 옷섶에서 털어내기도 했을 테다. 모두가 조금 더 가난하게, 머무는 장소에서 식솔들과 더불어, 새와 짐승에게 마지막 먹을 것을 남겨주면서 다정하게 나누는 공동체적 삶. 인간이 모든 욕심을 버리고 이 유토피아의 진경에 자기가 살 주소를 매기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꿈꾸는 것은 그 정신이 맑기도 하지만 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연인으로서의 선생은 육신의 병도 그렇지만 해방둥이라는 시대적인 아픔까지 품고 있다. 한반도를 할퀸 생채기가 선생의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청결하고 엄격한 정신은 상처 위에 섣불리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지 않는다. 되려 옛 수도자들처럼 선생은 새벽이면 상처를 들춰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셨을까. 상처투성이 마른 몸이 가볍고 깨끗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거기에 한 줌의 자기위로도 얹지 않는 결벽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권정생 선생을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분으로 제멋대로 생각했지만 선생은 '가장 뜨거운 온도로 인간 세상의 평화를 기도' 하는 치열한 구도자였다. 선생의 꿈은 선생의 생전에도 그리고 사후로도 완전하게 이루어지기 어렵겠지만 그 정신이 향하는 방향에 우리가 살아남을 길이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마스크가 피부가 되고 장마가 사어가 되는 시절을 사는 우리에겐 더더욱 선생의 언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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