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숙 시집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by 별이언니

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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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는 길인 듯 오래된 골목을 걸어들어가 처음 가는 가게인 듯 찻집의 문을 열면 처음 앉는 자리인 듯 낡은 테이블이 있고 창가에 앉는다. 이마에 쏟아지는 것은 기운 햇빛인데, 유리와 먼지를 통과하며 달궈져서 제법 뜨겁다. 뒤죽박죽으로 편집된 메뉴판에서 가물가물한 기억을 집어올려 홍차 한 잔을 주문했는데 어라, 막사발에 나왔네. 주인장은 점잖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뒤로 물러나고 나는 정말 홍차를 시켰나, 갸우뚱하며 바라보니 이 녹빛은 눈물이 나도록 맑고 그리운 색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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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은 달라져도 물빛은 그대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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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헹구는 투명한 물빛에 잠깐 마음이 벅찼다. 물리에 약한 카프카씨의 관짝같은 책들을 열어보며 당신도 그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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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싶었다. 쥐면 부서질 것 같은 몸이 비명을 질러도 구부정하게 웅크려 글을 쓰는 벌레. 그레고리 잠자의 곁에서는 과연 편하게 잠들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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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싶었다. 겨울은 다가오고 그림자는 사정없이 길어지고 불은 흔들리고 그리고 한 자 한 자 집요하게 글을 쓰는 어느 등에 대해서. 패색왕이 된 밤의 정신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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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싶었다. 주인장은 빈 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직 목이 말라요. 테이블 위에 지폐 몇 장을 내려놓고 가게를 나선다. 다시는 찾아오지 못할 것 같은 골목을 걸어내려가 모퉁이를 돌면 신기루처럼 펼쳐지는 세상. 이 반짝반짝한 낮의 한복판으로 말라 비틀어진 그림자를 끌고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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