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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여명 Mar 27. 2024

엄마가 말하던 무지개가 꼭 이랬을까

본 조르노, 아이와 함께 떠나는 이탈리아 여행

네가 태어날 때, 엄마는 무지개 꿈을 꿨지. 내 태몽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엄마는 꼭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창문을 연 순간, 눈부시게 선명하고 커다란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다고, 그 이야기를 할 때면 엄마는 꿈에서 본 그 무지개가 여전히 선연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여행 한 달쯤 전, 우리는 엄마, 아빠가 되기 전, 그러니까 꽤나 자유롭게 여행하던 시절 우리가 잠시 머물렀던 해안가의 작은 마을을 떠올렸다. 미지근한 바닷물이 파도를 타고 발끝을 적시는 어여쁜 해안과 절벽을 따라 옹기종기 붙어있는 파스텔톤의 자그마한 집들, 산비탈을 가득 메운 포도와 올리브밭이 다섯 개의 작은 마을을 손님들로 북적이게 하는 곳.


우리는 둘이었을 때 방문했던 친퀘테레를 셋이서 다시 보고 싶었다. 본래 시칠리아를 향해 계속 내려가려던 우리의 계획이 바뀐 것도 이 때문이었다. - 결정적으로는 피렌체가 끼어들면서였지만!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여행의 상황과 코스를 고려해 우리는 친퀘테레 대신 근처의 작은 항구 마을, 포르토 베네레를 선택했고, 이것은 꽤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마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낑낑거리며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몇 층을 올라간 작은 호텔방의 창밖으로, 티셔츠를 벗은 채 축구를 하고 있는 이탈리아 소년들이 보였다. 그 뒤로 잔잔한 포르토 베네레 항구에 정박한 새하얀 요트들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호텔 방에 달린 앙증맞은 테라스를 연신 들락거리며, 아이가 이탈리아 소년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산책을 서두른다. 햇살의 온기가 남은 이 어여쁜 마을을 구석구석 걸어보자.


호텔 앞에 있던 자그마한 해안으로 아이가 내려간다. 옷자락이 젖는 줄도 모르고, 아이는 바다에 통통한 발을 담근다. 크고 작은 소음조차 파도를 타고 휩쓸려가는 듯한 고요함에 절로 호흡이 안정되는 순간. 이제 곧 지중해의 석양이 이곳을 붉게 물들이겠지. 아, 여기에 오길 참 잘했다.


저녁 식사를 위한 레스토랑을 예약하기 위해 물놀이는 이제 그만하자니, 아이의 입술이 댓 발 나온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도 영 기분이 별로인 모양이다. 그때였다. “무지개가 떴어요! “ 우리의 여행 메이트가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니, 꽤나 선명한 무지개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랑은 멀리 있지 않다. 그저, 행복하다 느끼는 삶의 어느 한 자락에, 눈을 마주칠 누군가가 있다면, 혹은 기꺼이 함께 하고 싶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

아이가 웃는다. 사진을 찍자 하니, 브이도 한다. 비가 지나가 깨끗해진 공기 사이로, 일곱 빛깔의 무지개를 눈에 담는다. 엄마가 이야기하던, 그 선명한 무지개가 꼭 이랬을까. 그곳에 그대로 있어주어 고마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잠시 머물 수 있게 해 주어 고마운, 수많은 어딘가. 그곳에 머무는 순간, 우리는 더없이 행복했다고, 선물처럼 함께해 준 햇살과 바람과 파도에게, 그리고 무지개에게 또 우리가 걸었던 좁은 골목들에게,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준 다정한 누군가에게, 우리는 나지막이 고마운 마음을 실어 보낸다. 여전히, 아이의 방 한 켠에 걸려 볼 때마다 정다웠던 그곳을 떠오르게 하는 앙증맞은 가방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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