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서류를 제출한 날. 2023.10.23.(월)
교사연구년 알림 공문이 온 날부터 서류제출 마감일까지의 기간이 아주 짧았다. 딱 열흘. 보통의 공문과는 다른 차별화 속에 의도가 엿보인다. 간절함과 열정이 넘치는 분만 모시고 싶습니다 하는 무언의 압박 혹은 호소.
넘치는 간절함이나 열정이 있지는 않았다. 하루하루가 너무 버거워 잠시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에는 학교 생활이 즐거웠다. 마음 맞는 동료들이 있고 아이들은 예뻤다. 적극 연구해서 교육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열정을 발휘할 만한 연구 주제를 머릿속에 담고 살지도 않았다.
‘오호! 이런 게 있다고? 교사로서 누릴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이잖아. 안 되면 내년에 또 하는 거고. 일단 한 번 시도해 보지 뭐.’ 딱 이런 마음으로 신청에 관심이 가는 정도였다.
첫 번째 스텝. 옆자리의 10여 년 전 연구년을 경험한 친한 동료에게 문의하기.
“해 볼까?”
“해, 무조건 해. 샘은 분명 돼. 내가 썼던 계획서 보여줄게. 연구 주제를 잘 잡아야 해. 남들이 많이 하지 않을 주제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교육정책의 핵심을 반영한 것으루.“
그녀의 답은 명쾌했다. 주제 선택 잘한 후 자신의 도움받아 계획서 잘 쓰면 연구년이라는 멋진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너는 할 수 있다. 갑자기 용기가 한 계단 상승한다.
두 번째 스텝. 교장실에 들어가서 추천서 부탁드리기.
“추천서 써 주실 수 있으신지...”
“아이고, 부장님. 작년에 학폭 업무하고 올해 연구부장 하더니 힘드시구나. 뭐든 제가 도움이 된다면 도와드려야지. 하셔요 하셔요."
교장실 문을 나서는데 조금 겸연쩍다. 이렇게 좋은 교장선생님과 함께라서 나는 힘들지 않았는데. 그래도 교장선생님의 응원도 있고 하니 한 번 해봅지요.
공문을 출력해서 퇴근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식탁에 앉아 꼼꼼하게 서류를 살펴보며 주요 문구에 밑줄을 긋는다. 남편은 어깨너머로 무슨 공부에 그리 열심이냐고 묻지만, 나는 묵묵부답으로 고개를 갸웃대며 내용에만 집중.
공문의 주요 내용을 이러했다.
연구분야는 경력 15년 이상이 지원 가능한 ‘교육연구’와 ‘정책연구’, 경력 25년 이상이 지원할 수 있는 ‘교육회복연구’가 있다.
나는 15년 이상의 교육연구나 정책연구 중에서 분야를 정해야 한다. 무엇을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교사로서 현장 밀착형 학생중심교육의 '교육연구'가 먼저 끌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내 옆자리 선생님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남이 안 할만한 주제를 선택해야 해.
교육연구 정책연구 쪽에 더 깊은 시선을 보내며 읽어 내려간다.
좋다. 결정했다. 정책연구를 하겠어. 지난 1년간 맡았던 업무 중에 특히 많이 고민했던 분야가 있다. 공문에 적힌 많은 글자 속에서 그 단어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럼 이제 서류심사 기준을 좀 꼼꼼하게 보자. 앗, 연필이 필요하다. 종이 여백에 곱하기 더하기를 계산하며 소수점까지의 점수를 적어야 했다. 교육경력 20년이 만점이나 나는 휴직기간이 있어서 경력점수가 뚝 떨어진다. 담임과 부장은 각각 9년을 해야 만점 5점이다. 나는 두 항목 모두 만점이 아니다.
연필로 계산해 본 점수는 부끄러운 수준. 연구실적, 위촉장 등 항목별로 계산을 하면 할수록 만점대비 점수는 점점 낮아진다. 수학 때문에 대학에도 못 갈 뻔한 나의 계산 실력이 의심스럽다. 다시 곱셈과 덧셈을 반복해 본다. 틀리지 않았다. 이런, 실망감이 밀려오며 자신감이 폭락했다.
정량평가 60점 만점에서 내 점수는 말할 수 없이 낮다. 평생 받아본 적 없는 점수이다.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연구년 계획서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연구년 계획서 40점 만점이 더해진다 해도 역시 낙제 수준의 숫자가 나오는데, 시도해도 되는 것일까
나와 상관은 없지만 교육회복연구 분야의 평가기준도 살펴보았다. 경력 30년이 만점이구나. 나는 30년이 되면 정년퇴직인 걸. 나에게 교육회복 분야는 해당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제 공문을 덮고 눈을 감는다. 생각한다.
결론 정리. 서류제출은 한다. 정책연구 분야로 지원한다. 정책연구 분야의 연구주제는 00으로 한다.
눈을 뜨고 연필로 끄적인 정량평가 점수를 다시 한번 내려다본다. 슬퍼진다. 될까 싶다. 숫자로 나를 보여야 하는 것의 아쉬움이 크다. 숫자로 표현되지 못하는 나의 괜찮은 점을 어떻게든 연구계획서 안에 녹여 넣어야 한다.
생각만 차곡차곡 쌓다가 주말이 지나가 버렸다. 월요일의 시작은 눈코 뜰 새 없는 분주함의 반복을 의미한다. 월요일과 화요일, 머릿속에 계획서라는 단어만 떠 다닐 뿐이고 무엇도 하지 못했다. 수요일 밤 드디어 식탁에 각을 잡고 앉았다. 돌아오는 월요일이 서류 제출 마감인데 그제서야.
표지 포함 15쪽 안에 나의 교육 철학과 연구 계획을 짜임새 있게 집어넣어야 한다. 모든 계획서는 내용만큼이나 외모가 중요함을 알기에 예쁜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인다. 외모에 신경 쓰다가, 내용을 채울 연구 논문과 법령들만 다운로드하다가 금요일이 와 버렸다. 이런이런 D-4야.
담임경력 확인서 같은 정량평가 근거 서류는 주중에 미리 챙겼다. 담임경력 증명서는 이전 학교들에 팩스 민원 신청을 해야 하므로 시간이 좀 걸린다. 학교장 추천서, 위촉장 등의 자잘한 서류 챙기기에도 꼼꼼함이 필요했다. 특히 같은 서류를 3부씩 준비해야 해서 번거로웠다.
서류 제출 전날인 일요일에 학교에 잠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컬러로 연구계획서를 출력해야 했고, 각종 서류 정리, 인사기록카드 출력 및 원본대조필 도장 찍기 등 할 일이 많았다. 서류 제출일인 월요일에 나는 5시간의 수업을 해야 하고 일과 중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기에 주말 작업이 필요했다.
텅 빈 교무실 커다란 테이블에 서류들을 쫘악 펼치며 꼼꼼하게 정리했다. 계획서와 각종 서류들을 다 합쳤을 때 40쪽이 넘으면 안 된다. 어떤 서류는 양면으로 어떤 서류는 단면으로 인쇄해야 했다. 서류를 정리할수록 일요일에 출근한 나를 칭찬하고 싶어졌다. 이걸 월요일에 하려 했다가는 시간 내 제출 불가였다 분명.
서류 제출일인 23일 월요일이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1교시 시작 전에 공문으로 서류를 보냈다. 첨부할 수 있는 파일 용량이 제한적이라 PDF 파일의 용량을 줄이는 작업도 필요했다. 그리고 종종거리며 하루를 보내고 수업이 끝나니 4시 15분이다. 5시 안에 교육청에 세 권으로 만든 서류를 들고 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본테이프로 예쁘게 마무리해야 하는데 어라 학교에 제본 테이프가 없네. 이런 난감함이란! 하긴 요즘 세상에 제본테이프로 서류를 묶을 일이 별로 없긴 하지.
학교 앞 문구점까지 차를 몰고 간다. 문구점 직원과 함께 2층 구석을 뒤져서 먼지 뒤집어쓴 노란색 제본테이프 마지막 남은 한 개를 간신이 찾았다. 좋아하는 색상이 아니지만 선택의 여지없이 노란색의 테이프로 스테이플러 자국을 덮는다.
4시 50분쯤 교육청에 도착 성공. 주차할 곳이 없어 대충 자동차를 아무 데나 던져두고 서류 제출하러 뛰었다. 지난 일주일간, 계획하고 자료 찾고 작성하고 꾸미고 출력하고 신청하고 복사하고 도장 찍고 만들고 제출하고 뛰어다녔다. 정신이 한 개도 없었다. 아! 이런 열정을 보려고 그렇게 꼼꼼하고 복잡하게 서류 제출 시스템을 만들었나 싶었다. 대단한 꼼꼼함과 빛의 속도가 필요했다.
어찌 됐든 이렇게 2024 경기교사연구년 서류 제출을 아슬아슬 무사히 완료했다.
서류만으로 나를 보여주는 것은 난감한 일이다. 내가 만든 세 부의 책자가 누군가의 책상 위에서 아름답게 펼쳐지고, 그 누군가가 나의 멋진 점을 잘 읽어 내시고, 좋은 판단을 해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내 몫의 최선을 서류에 고이 넣어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