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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모기 Feb 26. 2024

기다림, 불합격과 합격 사이에서.

교사연구년 1차 서류심사 결과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간 갈 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 도종환, <바람이 오면>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라는 시인의 말이 좋다. 나 역시 내게 다가오는 많은 것을 은은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사람이라, 시가 내 마음에 닿았다.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에는 많은 것이 찾아오고, 온 것은 머물다가, 결국 간다는 이치쯤은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 교사연구년 면접 대상자 발표를 기다리면서도 오는 대로 받아들이리라 하는 의연함을 품고 지냈다.


10월 23일 월요일 심리적 난리법석 속에 서류를 제출하고 나서 차분하게 날이 가길 기다렸다. 1차 서류를 심사한 후 2차 면접대상자를 발표하는 날은 11월 3일 금요일이었다. 기다리는 2주의 시간이 길었다. 아침에 눈을 뜨며 '음,,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를 먼저 생각했다. 기다리지 않는 척, 의연한 척하면서도 내면의 깊은 곳에는 조금 다른 마음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금요일이 되었다. 그 아침도 예외 없이 눈 뜨며 '오늘은 금요일. 오늘이구나.'를 중얼거렸다. 내가 기다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계속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상관없다, 나는 단지 결과가 궁금한 것뿐이라고. 정말로 진짜 그것뿐이라고. 정말 진짜였을까. 생각해 보면, 그 말은 반만 맞는다. 결과가 궁금한 이유는 내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있는지 아닌지를 알고 싶기 때문일 터이므로.


금요일 오후로 예약해 두었던 병원 예약도 취소해 버렸다. 공문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대기해야 했다. 학교에서는 연구년 신청한 것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기에 옆자리 짝꿍 선생님과 교감님 교장님 이외의 분들은 모르고 계셨다. 왠지 쑥스러워서 공문 담당하시는 실무사님께 '혹시 연구년 관련 공문 온 거 없나요?'라고 묻지도 못했다. 혼자서 끙끙 하루종일 공문함만 들락날락했다. 수업이 끝나면 종종종 달려와서 공문함을 열어보고 작게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시곗바늘이 퇴근을 가리킬 무렵에야 머리에 딱 떠오른 것이 있었으니, 그래 공문에 이런 말이 있었다.


아, 1차 서류 통과한 교사의 소속교에만 공문을 보낸다. 즉 서류심사에 떨어지면 공문이 안 온다. 아직 공문이 안 왔다는 것은 나의 불합격을 의미한다.

발표날이 되기까지 궁금했고 설렜고, 발표날 아침부터는 살짝궁 긴장이 되었는데, 비로소 마음에 '인정'이란 단어가 가득 찬다. 서류를 작성하면서 나의 턱도 없이 낮은 정량평가 점수에 좌절했던 걸 잊고 헛된 꿈을 꾸었구나. 혹여나 계획서가 만점이 나온다 해도 100점 만점에 너무 낮은 점수여서 혼자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진하게 떠오른다, 그제야.


미련 없이 짐을 챙겨 퇴근을 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원래 나는 인생에 계획이 다 있었다. 2024년이 아닌 2025년에 학교를 잠시 쉴 생각이었다. 남편이 그해에 일을 쉬게 될 것이므로 함께 여행 다니자고 약속했었다. 무급인 자율연수 휴직이라도 할 참이었다. 원래 계획대로 된 것이니 잘 되었다.

현재의 학교 동료들도 아주 좋은데 이 좋은 사람들과 2024년을 함께 보내게 되었으니 잘 됐다, 업무도 올 한 해 동안 익숙해졌으니 내년에 같은 업무를 맡는다고 해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2024년과 2025년의 날들까지 생각하며 나에게 작은 위로를 보냈으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또 어쩔 수 없었다. 서류 쓴다고 며칠 밤 홀로 불 밝히며 고전했던 시간도 떠올랐다. 역시나 시도 후 실패는 단맛일 수는 없다. 아쉬움과 허전함과 상실감의 크기는 작지만 커서, 주말을 보내는 동안 마음 어딘가에 씁쓸함이 맴돌았다. 그 씁쓸함을 이겨낼 미래에 대한 달콤한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다짐을 하며 주말을 보냈다.


오는 대로 받아들여야지 하면서, 도종환 시인의 '바람이 오면'을 중얼거리면서 월요일 씩씩하게 출근을 했다.

그리고 그 월요일 아침에야 알았다. 공문은 금요일 퇴근 시간 무렵에나 뿌려졌고(교육청의 합격자 발표는 늘 그렇지), 2차 심층 면접 대상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 었. 다.


목소리 큰 짝꿍 선생님이 "합격이라고?"를 외치는 바람에 교무실 식구들 모두가 박수를 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나는 쑥스러워 벌게진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마음속이 기쁘기보다는 이상할 만치 담담했다. 주말 동안 대략적이긴 하나 미래 계획을 다 짜 놓았는데, 어렵게 돌려 잡았던 마음을 다시 돌려놓아야 할 판이다.


불합격과 합격의 자리에 한 번씩 서보니 역시 합격이란 말이 좋긴 좋다. 내 교직 인생에 새로운 이벤트가 또 생겼다. 이 오묘한 맛이 좋아 나는 자꾸 새로운 도전을 한다. 일기장에 끄적였던 2024년 시간표에 빨간 줄을 긋고 미래를 다시 써봐야겠다.


내 삶에 좋은 바람이 불어와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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