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혀의 초속

예브기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 17쪽에서

by 봄부신 날
혀의 초속은 언제나 사고의 초속보다 약간 느려야만 한다.
절대로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브기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 17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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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류의 글들을 좋아한다. 작가가 책 전체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심을 관통하는 주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글이라고 보기 어려운, 살짝 스쳐가듯 지나가는 글들 속에서 하얀 치아처럼 빛나는 보석 같은 글들이 있다. 중심 이야기와 큰 관계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인1, 행인2처럼 스쳐 지나갈 법한 문구. 그러한 짧은 글들이 나를 끌어당긴다.


이 책은 조지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SF 디스토피아 미래소설이다. “은혜로운 분”의 통치를 받는 세계, 고대인(지금의 우리)들의 모든 부조화를 말끔히 걷어낸 완벽한 세계, 모든 것이 공개되어 있고 오직 사랑하는 날만 “커튼 사용권”을 받아 남녀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조금은 딱딱하고 기계적이고 차가운 내용들이 가득할 것 같은 – 실제로도 다른 소설에 비하면 그런 감이 많다 – 책이지만, 가끔 저렇게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좋은 문장들이 모래밭에 숨겨진 사금처럼 반짝거린다. 내가 할 일은 저런 사금을 캐내어 진짜 보석처럼 간직하는 것이다.


“혀의 초속”이라는 놀라운 비유를 만들어 낸 앞뒤 문장을 잠시 살펴보자.



"저 사람은 내게 등록된 사람이에요." O-90은 기쁨에 차서 장밋빛으로 말했다.

입을 다무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을. 그녀의 말은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사랑스러운 O는 – 글쎄,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 그녀의 혀의 속도는 부정확하게 계산되어 있다.

혀의 초속은 언제나 사고의 초속보다 약간 느려야만 한다. 절대로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더 이상 그녀의 혀의 속도에 대하여 말을 이어가지 않는다. 나 같았으면 한 문단 정도 더 할애했을 터인데, 그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작가에게 경이로움을 느낀 건, “혀의 초속”이라는 비유 때문이었다. “초속”이라니. 이 한 단어로 인해 작가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훨씬 강렬해졌고, 그것을 읽어내는 독자들은 0.000001초 정도의 짧은 속도감을 느끼며 말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혀의 속도”

“혀의 시속”

“혀의 초속”


이 세 비유를 놓고 비교해보면 “초속”이 주는 긴박감과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사실 “혀의 속도는 언제나 사유의 속도보다 약간 느려야 한다.” 정도로만 말해도 아, 하며 탄성을 내지를 것인데, “혀의 시속은 언제나 사유의 시속보다 약간 느려야 한다.” 정도로만 말해도 아, 하며 감탄사를 연발할 텐데, “혀의 초속”이라니, 그 언어적 도발 앞에 감히 할 말을 잃고 만다.


정말 1초만 더 생각하고 말을 했더라면 좋았을, 그 안타까운 1초의 실수들을 우리는 참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나 역시도 수없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1초가 중요한 까닭은 “말”이란 것이 형체도 없고 흔적도 없지만, 사람의 심장 깊이 박히는 날카로운 도구인데다, 흘린 음식물처럼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들의 말은 생각의 속도보다 조금씩 빠르다. 그러나 결코 주워담을 수가 없다. 많은 정치인들이 세치 혀 때문에 성공의 문턱에서 넘어졌다. 시속으로 표현하지 않고, 초속으로 표현한 말에 대한 비유, 작가의 한 문장을 통해서 오늘 하루가 조금 더 진지해졌다.


오늘 하루 내 혀의 초속을 늘 신경써야겠다. 사고의 초속을 앞질러가지 않도록. 스스로에 대한 자랑도 참 겸연쩍기 그지 없지만, 무엇보다도 특히, 다른 사람, 다른 그 무엇에 대한 말을 할 때는 언제나 더욱 그러해야 한다. 못자국은 못을 뽑아내어도 결코 흔적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사고의 초속을 앞질러가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단 하나의 <할 말>이 남게 된다면 그 말은 무엇일까. 혀의 초속을 앞질러 가야할 단 하나의 말, 그것은 “사랑”이다.


<당신을 사랑해.> 이 말만은 예외다. 혀의 초속을 앞질러 언제든지 아침에 아침식사보다 먼저 차려져야 하는 혀의 정찬이다. 양치를 하고 정갈한 혀와 입술로, 당신을 향해 말한다.

당신을 사랑해요. 오늘도 어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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