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으로 가다
[책방으로 가다] 전지영
한줄평 :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일상의 기록들
내가 책을 읽기 위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는 "독서" "책방" "서점" 같은 단어들이다. 책 읽는 행위를 하면서, 다른 사람의 책 읽는 이야기를 즐기는 건 무슨 연결고리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책방이라든지, 서점, 독서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은 일단 집어들고 본다. 주로 중고책을 고를 때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면 생각지 않게 좋은 책을 발견하곤 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책인데 내게 선물처럼 찾아와 안겼다. <책방으로 가다>라는 동사형 제목으로 도대체 어떤 내용으로 책 한 권을 채울지 무척 궁금했다,
"왜 책을 읽어야 하나요?"
누군가 그렇게 물었을 때 생각해 보았다. 하긴 책을 특히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다.
늘 그렇듯 답은 책 속에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서 주인공 덴고는 수학을 가르치면서 소설을 쓴다. 그는 수학 공식을 푸는 행위와 소설을 읽는 행위가 일종의 여정이라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여정의 끝에 이르렀을 때 수학 공식은 얼마간의 성취감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반면 소설은 누군가와 함께 돌아온다. 하루키는 그것이 덴고가 소설을 쓰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10)
역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눈썰미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나도 하루키의 <1Q84> 책을 읽었지만 저 장면이 특별히 기억나진 않는다. 대신 얼마 전 읽고 후기를 쓴 <막막한 독서> 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의 책을 펼쳐 놓고 멍한 채로 앉아 창밖을 보는 것도 책 읽는 행위와 같다고 한 시로군이 생각난다. 책을 읽는 행위는 하나의 '여정'이다. 성장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영국에서 유학하면서 세계열강을 추종하는 일본(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꼈다. 자루 속에 갇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동료 일본인까지 미쳤다고 수군거릴 정도로 하숙집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123)
이 책은 "책방으로 가서" 책을 고르거나, 다양한 책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을 거란 기대를 저버린다. 그런 책이 아니었다. 여러 소제목 가운데 "책방으로 가다"가 하나 포함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작가의 생각을 다양한 색깔로 그려놓은 화첩 같은 책이었다. 잔잔했고 느렸다. 작가의 생각을 함께 따라가기에 딱 좋은 책이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더 좋다. 외로움 속에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아무도 없는 혼자인데 오히려 완전한 시간이 있다. 외로움은 혼자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순간에도 외로움은 찾아온다. (10)
소설처럼 어떤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읽다보면 저자의 심리 상태나 환경 변화를 알아차릴 순 있다. 작가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레이먼드 카버의 예를 들며 설명한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직장이 필요하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하는 와중에 부양할 아이들을 돌보면서 글을 쓴다는 건 지옥에서 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레이먼드 카버의 젊은 시절은 그런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21)
유명한 작가가 되어 인세와 강연료만으로 살아가기에는 작가라는 타이틀은 모래 위에 세워진 성과 같다. 한줌 바람만 불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는 직업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직장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독백은 그래서 내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렇게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훌륭한 작품을 써낸 작가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위로를 받는다.
이 책은 저자의 넋두리, 아니면 내면 일기 같은 글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책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문장 한 줄에서 위로를 받거나 동병상련을 느낀다. 저자와 같은 감정이 되어 차분해지거나 슬퍼지거나 한다.
삶의 어떤 부분은 말할 수 없다. 말하려고 하는 순간 그것은 그저 가볍고 우스운 것으로 변해버린다. 어느 날 삶을 텅 비게 하는 것, 쓸모없는 무엇으로 남아 있는 시간을 가득 채우는 것, 아무것도 없는 오늘을 견뎌야 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25)
저자는 이야기 끝 무렵에 가끔 좋은 작가, 좋은 책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책을 좋아하는 작가는 어쩔 수 없다. 그들의 주식이 책이었기에 나오는 결과물도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 또 몰랐던 책을 하나 알아간다, 이번에는 로맹가리의 <그로칼랭.>이다. 나는 즉시 주문을 했고 지금 내 책상 위에는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다른 이름으로 출간했던 첫 책 <그로칼랭>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제는 로맹 가리가 두 이름으로 책을 출간하면서, 작가에게 딱 한 번만 수여되는 '공쿠르상'을 두 번 받은 유일한 작가라는 새로운 사실도 안다. 그는 1956년 로맹가리의 이름으로 낸 <하늘의 뿌리>로 프랑스 공쿠르상을 받았고,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출간한 <자기 앞의 생>으로 두 번째 공쿠르상을 받았다.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그가 죽고 나서야 밝혀졌다.
쿠쟁이 부재한 누군가를 대신해 바로 그 대상이 된다는 전개는 로맹 가리의 실제 삶과 무척 닮아 있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의 모습을 뒤집어 썼던 것처럼 소설 속 쿠쟁은 비단뱀 그로칼랭으로 살기 원한다. 그는 봄날의 도시를 부유하는 흐릿한 유령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허물을 벗고 자신의 존재를 또렷하게 만들어 주는 대상으로 변모한다. (71)
어떤 문장 앞에서는 멈칫거린다. 저자의 말을 곱씹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을 찾을 수 없게 된다'니, 이건 무슨 말인가.
사람들은 나의 마음이 곧 나 자신이라고 쉽게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의 마음은 나의 몸과 마찬가질 나를 이루는 하나 요소일 뿐, 나 자신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을 찾을 수 없게 된다. (96)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은 늘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136)
문장 속에서 고통을 길어 올린다. 마음의 두레박은 출렁거리면서 한껏 담은 물을 밖으로 쏟아낸다. 마음은 진정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마음을 믿으면 안 된다. 마음을 따라가면 안 된다. 나는 내 마음이 아니다. 그러면 마음따라 쓴 이 이야기들은 무엇인가. 이글은 다 무엇인가. 내마음이 진정한 '나'는 아니지만, 나와 비슷한 그 무엇일 수는 있다. 그래서 나는 "책방으로 간다." 책을 펼치고 다른 삶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따라가는 게 훨씬 즐겁다. 두레박 속에는 그래도 쏟아지지 않은 시원한 물이 담겨 있다. 해갈할 정도는 된다. 물맛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