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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Jan 12. 2017

<독서후기> 야만인을 기다리며

존 쿳시

글쓴 이 : 존 쿳시

옮긴 이 : 왕은철

펴낸 이 : 들녘총 쪽수 : 278 

한 줄로 제목을 만든다면: 야만 같은 문명에 맞선 한 문명인의 소중한 야만 찾기 

"야만인을 기다리며" 한국어판 책 표지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원제는 "Waiting for the Babarians" 이다. 즉, "바바리안을 기다리며"이다.바바리안은 야만인, 미개인, 속물인, 교양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스스로를 교양인이라 생각했고, 그들의 기준으로 볼 때 이방인들이 내뱉는 소리는 바바(ba-ba)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바바리안'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이 '바바리안' 속에는 그들이 바바- 소리밖에 말하지 못한다는, 그러니까 자신들처럼 논리 정연한 사고를 갖추지 못한, 미개한 종족이라는 멸시적인 시선을 내포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 펭귄클래식판 표지


그렇지만 놀랍게도 우리나라 역시 서양 사람들을 오랑캐라고 불렀고, 중국 역시 서양 사람들을 무지하고 동물적인 오랑캐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예의가 바르고 위아래  질서가 있지만, 저들은 도무지 예절이 없고 예법도 없는 미개한 사람들에 불과했다. 단지 그들은 총과 칼로 정복하는 동물과 같은 종족이었다. 


존 쿳시의 2003년 노벨문학 수상작품인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에 충만해 있는 한 문명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대적 배경과 지리적 배경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있는, 정확하게 어떤 실체적 사건을 중심으로 두고 있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더 홀가분하게 문명인이 가지는 야만인에 대한 인식의 야만성을 제대로 폭로할 수 있게 된 작품이다. 말을 타고 이동하며 다니는 야만인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을 개척하고 정복한 문명인들이 그 곳에 성을 세우고 야만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며 생활하고 있다. 


주인공은 이곳의 치안판사로 문명국가에서 파견한 성의 실질적인 대표이다. 그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재판을 담당한다. 그는 문명국가의 덕을 입고 있고 사실상 왕처럼 군림하였지만, 어느 날 정부에서 파견된 군대가 야만인들을 포로로 잡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주인공은 야만인들과 경계를 마주하고 오랜 기간 생활하면서 그들이 그저 물고기를 잡아 먹고 생활하는 어부들이거나, 말을 타고 유목 생활을 하기에 특별한 거처가 없을 뿐이지, 악의를 가지고 전쟁을 하는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사고는 국가를 배반하는 것이며, 국가의 가치관과 주적개념을 송두리째 바꾸는 개념이다. 군대는 문명인을 자초하고 야만인을 적으로 간주하여 잡아들이지만, 정작 포로들에게 하는 야만적인 고문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군대가 떠나고 난 뒤 주인공은 군대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자신의 순결과 시력까지 잃게 된 야만인 여자를 거두어들여 자신의 곁에서 생활하게 한다. 


그녀와 함께 있지만 그녀를 사랑할 수 없었던 그는 야만인 부족에게 다시 돌려주기로 결심을 하고 긴 시간 이동한 끝에 그녀를 이동 중인 야만인들에게 넘겨주고 되돌아온다. 그는 적과 내통한 스파이 혐의로 감옥에 갇혀 힘겨운 고문을 받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동양으로부터 종이 등 위대한 유산을 훔쳐간 서구인들이 자신의 문화를 문명으로 포장하고 그 외 모든 문화를 미개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멸시하고 조롱한 세계 근현대사가 떠올랐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야만이이었고, 우리들에게는 그들이 야만인이었지만, 그들의 야만은 동적인 총칼과 대포를 앞세워 먹과 붓으로 막아선 정적인 문명을 미개하다고 짓밟았다. 


소설은 글로써 야만과 문명을 대비시키거나 논리적으로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 소설은 이야기로만 사실을 전달하고 주인공의 마음을 의심케 한다. 건조한 고비사막처럼 소설은 읽는 내내 마른 먼지가 폴폴 날린다. 심지어 주인공과 야만인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조차 시간은 먼지 속에 갇힌 것만 같다. 


노벨문학상 작가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가 자극적인 설정과 예상 가능한 직선 전개로 노벨문학상 작가라는 기대에 다소 미치지 못했다면,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사라마구보다는 노벨문학상 작가임을 조금 더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 역시 노벨문학상이라는 묵직함에 비하면 전체적인 인문학적 깊이와 소설적 재미는 다소 떨어진다고 본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고뇌하게 하고, 문명인이라고 자처하는 나 자신에 대한 문명의 개념과 정의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자기 반성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훌륭한 소설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의 소설이 주는 또 다른 효과는 권력과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이다. 


최근 우리는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마약인지 새삼 깨닫는 중이다. 권력이라는 약에 한번 취하면 초심은 몽땅 잊어버리고 오직 권력만을 쫓아다니는 중독자가 되어 스스로 팔목을 열어 주사기를 꽃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는 최고 권력자에서 죄인으로, 그리고 다시 권력자로 바뀌는 지위의 순환을 통해 권력의 실체를 투사한다.  


그의 소설이 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면 늙은 치안판사인 주인공과 젊은 야만인이 나누는 사랑이다. 사랑은 머물러 있지 않고 진종일 찰랑거리지만, 소통이라는 창을 통하지 않으면 썩고 만다. 그는 소통하며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에게는 불소통의 시간들이었다. 


존 쿳시는 부커상을 2회 수상한 역량있는 작가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며 그의 작품들은 그런 상을 받을 만하다. 이제 그의 소설을 조금 더 들여다 봄으로써 그의 내면을 공유하고 싶은 욕심이 동한다. 



~~~~~~~~~~ 

내가 지난 20년 동안 치안판사로서 싸워야 했던 문제는 가장 저질적인 마부들이나 농사꾼들이 야만인들을 모욕하고 경멸한다는 것이었소. 특히, 그 경멸이라는 것이 식사 예절이 다르고 눈꺼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말고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의 뿌리를 어떻게 뽑을 수 있겠소? 내가 때때로 원하는 게 뭔지 아시오? 나는 이 야만인들이 들고일어나서 우리에게 교훈을 가르쳐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해줬으면 좋겠소. (88쪽) 


나는 하루종일 텅 빈 벽을 응시한다. 그걸 골똘히 응시하면 거기에 스며 있는 고통과 타락의 흔적이 나타날지 몰라서다. 그러다가 눈을 감고, 아주 희미한 음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청각을 집중시킨다. 여기에서 고통을 당했던 모든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벽에서 벽으로 울리는 소리를 잡아내기 위해서다. … 이틀간 독방에 갇혀 있다 보면, 입술에 맥이 빠지고, 내 말소리도 이상하게 들린다. 정말로, 인간은 혼자 살도록 만들어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나는 식사시간을 중심으로 하루를 보낸다. 나는 개처럼 게걸스럽게 먹는다. 짐승처럼 살다 보니, 진짜 짐승이 돼가고 있다. (137쪽)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아이가 두들겨 맞는데도 아이를 보호해줄 수 없다는 걸 아는 여느 아버지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결코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걸 안다. 자신이 그런 아버지여야 하다니. 더구나 그것 때문에 비난까지 받아야 하다니. 그건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죽고 싶어했던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138쪽) 


일상적인 삶의 고독에서 감옥의 고독으로 옮겨가는 것은 큰 고통은 아닌 것 같았다. (145쪽)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원시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145쪽) 


꿈속의 유령 외에는 아무도 얘기할 사람이 없이, 바퀴벌레들 사이에서 두 달을 보내고 나니, 나는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지고, 다른 사람한테 내 몸이 만져지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커져서 때로는 신음소리를 내야 할 정도다. (162쪽) 


그들은 끔찍한 일을 계속 수행할 것이다.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해야만 최종적인 진실을 말하게 된다는 게 그들의 신조다. (163쪽) 


나는 죄수들을 구할 수가 없다. 따라서 내 자신이라도 구하는 길을 택하자. 언젠가 누군가가  이것에 대해서 얘기하게 된다면, 그리고 먼 훗날 누군가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면,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177쪽) 


공기에는 한숨소리와 비명소리가 가득하다오. 그건 늘 있는 법이오. (191쪽) 


당신은 역사에 순교자로 기억되기를 원하는 것 같군. 하지만 누가 당신을 역사책에 기록해줄까? 국경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문제들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냐. 조금만 지나면 잊혀질 것이고, 변경은 이후 20년 동안 다시 평화로워질 거야. 사람들은 먼 과거의 역사에 관심이 없거든. (194쪽) 


이 고난에는 나를 기품 있게 만드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통도 아니다. 내가 겪어야 하는 것은 내 육체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에 종속되는 것이다.  마시고, 대소변을 보고, 가장 덜 아픈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196쪽) 


나를 고문한 사람들은 고통의 정도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육체 속에는 하나의 육체로만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내게 보여주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온전하고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만 정의에 대한 생각을 즐기다가, 머리가 붙잡히고 파이프가 목구멍 속으로 쑤셔넣어지고, 그 속으로 소금물이 부어져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고 도리깨질을 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 그랬냐 싶게 정의에 관한 생각들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그 육체 말이다. (198쪽)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물속의 고기들이나 허공의 새들이나 아이들과 같은 시간 개념 속에서 사는 걸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그건 제국의 잘못이다. (228쪽) 


그러나 나는 우물쭈물하면서 이름 없는 이 지역을 관망만 하고 있었다. … 참자, 저 사람은 떠날 것이다. 조만간 다시 조용해질 것이다. .. 나는이렇게 스스로를 유혹하면서 방향을 잘못 잡고 말았던 것이다.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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