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이끄는 마니아들
근무하는 출판사의 프로젝트로 작성한 글입니다.
안녕하세요. 욘케터입니다.
여러분은 푹 빠져 있는 게 있으신가요? 취미라거나 수집품이라거나 하는 것들 말입니다. 저는 자타공인 취미가 많은 사람입니다. 글쓰기, 그림 그리기, 게임, 독서, 코바늘 인형 만들기, 프랑스 자수, 피아노, 일본어 등등……. 하고 싶은 게 생긴 그날 바로 초심자 키트를 사거나 강의를 수강신청 해버립니다. 상당히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수박 겉핥기'를 실천하고 있달까요. 주위 분들은 더러 걱정하시기도 합니다. 약 30년의 생, 그저 한 우물만 팠으면 뭐라도 됐을 거라면서요. 저도 그런 걱정을 한 적은 있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세상은 너무나도 넓고 제 마음을 이끄는 것들은 이렇게나 많은데요.
그런 제가 최근 솜인형 수집에 푹 빠졌습니다. 보드랍고 폭신한 털과 말랑한 몸체를 쓰다듬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제 옷은 안 사면서, 인간의 옷값을 능가하는 조그맣고 앙증맞은 인형옷은 주저 없이 사버리곤 합니다. 택배 발송이 온 날 저녁엔 인형에 옷을 입히고 사진을 찍어 꼼꼼히 보정한 뒤 SNS에 올립니다. 취향이 같은 이들이 팔로우하면 바로 맞팔을 하고 교류를 시작하지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지구 반대편에 있는 타국 사람들까지 예쁜 인형 사진 몇 장으로 교류할 수 있다니, 참 재밌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이돌 멤버 이름은 못 외워도 수백 개가 넘는 솜인형 각각의 모델명은 다 외우고 있는 저를 집안 어른들은 그리 곱게 보시진 않습니다. 다 큰 성인이 몸집에 안 맞게 인형놀이를 하고 인형용품에 돈을 쓴다는 게 보수적인 관점에선 유아스러운 면모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전 이 취미에 몰입하고 있는데요. 다소 '오덕'스러운 이 취미는 의외로 일상에 큰 활력을 주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제 인생에선 가치 있는 행위이지 않을까요?
이토록 특정한 대상에 몰입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오타쿠(オタク)'라는 단어는 1970년대 일본에서 생겨났습니다. 당시에는 거의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분야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점차 대상의 폭이 넓어지며 활용성도 높아져 여기저기서 쓰이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1980년대부터 유입된 나름대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오타쿠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이미지는 그리 좋은 방향성을 띠고 있는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정통성 있는 기성 주류문화보다는 특색이 강한 소규모의 서브컬처를 아우르며, 상당수의 '오타쿠'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필요 이상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비치기도 하기 때문에,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하고 일탈을 꿈꾸는 사람을 일컬을 때도 쓰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편견 어린 부정적 인식을 뒤로하고 오타쿠들은 해가 갈수록 정말이지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고 있습니다. 현생에 지친 이들이 몰입대상을 통해 자신을 치유하고 직접 위로하는 문화가 발달하게 된 것이죠. 그 대상은 서브컬처의 정도에 속하는 만화일 수도 있고, 저처럼 인형이 될 수도 있고, 반짝거리는 아이돌 스타일 수도 있습니다. 각자의 취향에 소속된 이들의 화력은 엄청납니다. 파고들수록 쌓여가는 지식으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버립니다.
여기서 함께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이 바로 '마니아 마케팅'입니다. 마니아, 즉 오타쿠들의 분석력과 입소문은 엄청납니다.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이들이 몰입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점차 다양한 플랫폼으로 확산되는 취향 소비 과정에서 그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일반인들을 '입덕(入덕, 오타쿠 문화에 들어오는 것)'시키기도 하죠. 기업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장단점을 나열한 일반적인 마케팅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재미있는 브랜딩 효과를 낼 확률이 높습니다. 어디까지나 해당 산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소비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죠.
실제로 현재 여기저기서 난리도 아닌 <슬램덩크> 열풍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사실적인 그림체와 절로 꿈과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청춘들의 감동적인 스토리로 9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만화 <슬램덩크>의 영화화 소식은 바야흐로 3040세대의 눈시울을 적셨는데요. 현실의 고단함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그저 낭만적이었던 '그때 그 시절'을 복기하는 시간이 될 수 있었지요. 덩달아 한정특별판으로 나온 복각 만화책의 초도물량은 빠른 속도로 매진되었고, 서점 베스트셀러 30위 권 안에도 다수 진입하는 등 엄청난 판매 상승세를 보였습니다. 팝업스토어는 무려 2~3시간 웨이팅이 기본이었습니다. 슬램덩크를 소재로 한 수많은 굿즈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영화의 N차 관람 인증도 수도 없이 올라왔습니다. 심지어 응원 상연회라는 특별 상연 이벤트도 진행해서 관객 전원에게 응원봉을 지급하고 관람시간 내 좋아하는 선수와 팀을 자유롭게 응원하면서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하기도 했죠.
흥미로운 점은 <슬램덩크> 세대뿐만 아니라 이 만화를 읽지 않은 일이십 대도 이런 열풍에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SNS 여기저기서 온통 이 이야기뿐이니 그에 흥미를 갖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겠죠. 일단 재밌고 즐거워 보이니까요! 그야말로 오타쿠의 추억을 건드려 성공한 마니아 마케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언어도 문화도 생김새도 다르지만 공통적인 관심사를 통해 하나로 이어지는 오타쿠 문화는 그야말로 가치가 높습니다. 이 매력적인 문화의 생김새를 잘 파악해서 유대감을 형성하고 공략해 나가는 것이 마니아 마케팅의 핵심적인 포인트가 아닐까 합니다.
오랫동안 가지각색의 분야에서 입덕과 휴덕, 탈덕을 반복한 오타쿠로서 여러분의 취향도 들어보고 싶네요. 여유가 되신다면 댓글로 생각을 공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