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온병의 온도

나이의 감각

by 스털링

식탁에 늘 조그만 보온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오래된 보온병은 패킹이 헐거워 뜨거운 물을 부어 두면 수온이 어느 정도 내려갈 때까지 치-익 치-익 숨을 새곤 했다. 그 소리가 좀 거슬렸다. 게다가 아침이면 물은 식어 있어 결국 다시 데워야 했다.


“필요할 때 끓여 먹으면 되지, 왜 미리 끓여서 보온병에 담아 둘까?”

그 땐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냥 개인의 취향이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몸에 이상신호가 하나둘씩 나타나면서 병원에 갈 일이 잦아졌다. 언제까지 먹어야 할지 모르는 약도 늘었다.

알약은 미지근한 물과 먹어야 잘 넘어간다. 약 먹는 게 익숙지 않아 자주 건너뛰곤 한다.


‘아, 약을 먹어야지’ 생각이 들 때마다 생수를 끓인다. 뜨거운 물이 식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물이 식길 기다리다 보면 금세 딴 일에 정신이 팔리고, 약 먹는 걸 또 잊는다.


우연히 보온병에 물을 끓여 놓고 잊은 적이 있다. 아침에 식은 물을 마셔보았다. 목넘김이 편했다. 생각날 때 바로 약을 먹을 수 있다. 보온병 속 물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거칠지도 않다. 그저 부드럽게 넘어간다.

골디락스 같은 온도. 딱 좋다.


늘 식탁 한켠에 놓여 있던 그 보온병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늘 바구니에 가득 채워져 있던 엄마의 약. 내가 그 나이가 되어 간다.


누군가 그 때 보온병의 이유를 알려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치-익 치-익 보온병 소리도 거슬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오래된 보온병을 새 것으로 바꿔 줄 수 있었을 것이고, 보온병을 미리 채워 놓는 작은 배려 하나쯤은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이들면 알아지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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