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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나, 나다운 나, 참된 나: 숨겨진 비밀을 엿보다

바야흐로 밀어닥친 '나 찾기' 열풍을 보며

  요즘도 아니다. 꽤나 오래전부터 우리 주위에는 '진짜 나', '나다운 나', '참된 나'를 찾게 해주겠노라며 다가오는 손길들이 많았다. 서점에 가도 온통 '나'를 찾아주겠다는 책들이 가득하고, 강연장에 가려하니 '나 찾기'를 주제로 내 걸은 강연이 한가득이었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진짜 나를 찾게 해 준다는 이야기에 솔깃하여 종종 귀를 기울여본다. 나를 찾는 여정 끝에 있다는, 온갖 달콤한 보상들이 무척 유혹적이다. 예를 들어, 진짜 나를 찾는다면 원하는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진짜 나를 찾아야 행복할 수 있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대인 관계로부터 오는 온갖 갈등들을 해소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과연 그것이 얼마나 가능할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진짜 나'를 찾으라는 말들을 쉼 없이 듣다 보면, 나 스스로 마치 바보가 된 듯한 느낌을 종종 받게 된다. 평생을 함께 해온 '나'가 사실은 내가 알던 그 녀석이 아니라니. '진짜 나'라는 존재는 다른 곳에 있고, 나는 단지 엉뚱한 존재에게 '나'라는 이름과 시선을 투영했던 것에 불과하다니. 그럼 그동안 내가 알아오고 사귀어 오고 있던, 지금 내 안에 있는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리고 '진짜 나'라는 놈은 도대체 어디 있기에 이리도 만나기 어렵게 되어 있단 말인가? 무엇이 '나'고, 무엇이 '진짜 나'인가? 그것을 구분할 줄 모르는 나는 정녕 바보인 걸까?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 내가 즐겨 인용하는 이론은 바로 심리학자 쿨리(Cooley)의 거울 자아 이론(Looking Glass Self)이다. 거울 자아 이론에 따르면, '나'라고 하는 대상은 크게 세 가지 경로를 통해 만들어진다. 첫째, '내가 보는 나'. 둘째, '남이 보는 나', 셋째, '남이 보는 나를 보는 나'. 여기서 세 번째 경로가 약간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와 별개로,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라고 우리가 기대하는 바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생각이 우리의 자아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나'는 관념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실증적으로 규정된다.



  스스로의 지각에 의해서도 '나'에 대한 인식이 변하지만, 동시에 내가 속한 외부 세계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따라 '나'의 모습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거울 자아 이론에 비추어보자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려는 대개 사람들의 노력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소위 사회적 자아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면, 긍정적이고 보다 온전한 나로 거듭나고 싶다면 우리는 내부 · 외부 가릴 것 없이 전방위적인 노력을 펼쳐 나가야 한다. 즉, 내적 동기나 자기 가치감 등 내면의 성숙함을 기르는 동시에 그러한 나 자신이 외부적으로도 유능하고 성숙해 보일 수 있도록 사교, 화술, 대외적 역량, 예의범절 등을 길러 나가야 안팎으로 균형이 잡힌, '진짜 나'를 만나러 갈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사실 '진짜 나', '나다운 나', '참다운 나'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때로 위험하다. 이 말의 의미가 오해된다면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피해를 입게 될 가능성이 생긴다. 첫째, '진짜 나'를 찾으라는 담론들에는 대개 '외부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중요성이 과소평가되어 있다. 돈이나 명품 등 물질적인 것이나 타인의 시선 등은 중요하지 않으며, 오로지 내가 나 자신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내 잘못이다', '결국 내 마음의 문제다' 이러한 것들이 그들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일 터이다. 그러나 이는 바람직한 사회적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 즉 '잘 보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우리들의 지난 삶의 흔적들을 무시하는 일일지 모른다(사실 더 나은 스펙, 더 나은 명예 등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험난한 세상 속에서 원활하게 적응하는 한편, 생존이 걸린 경쟁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지극히 합리적이고 적응적인 생존 전략이다. 남들이 보기에도 바람직하고 우월한 사회적 지위의 확립. 그리고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각종 명예, 권력과 재산. 그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리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외부적인 것에 몰두한다 해서 그 노력이 함부로 폄하될 수는 없는 이유다).


  둘째, '진짜 나'를 찾으라는 말의 이면에는 때로 현재 내가 알고 있던 '나'를 부정하라는 의미가 담긴다. 다시 말해 '진짜 나'라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면, 지금 내가 데리고 있는 '나'는 곧 가짜일 수밖에 없다는 암시를 준다. 현재의 '나'를 부정해야 '진짜 나'를 만날 수 있다니.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바람직한 일일까? 여태껏 이 척박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와 파트너가 되어 열심히 고생해 온, 친숙한 '나'를 버려야 한다니. '진짜 나'가 무엇인지, 어떻게 만나야 하는 존재인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나'를 버리는 방식을 통해 만나야 하는 존재는 아닐 듯하다. 그보다는 지금 내가 알고 있던 '나'도 분명한 나의 일부이며, 앞으로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진짜 나' 또한 나의 일부라 받아들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사실 심리학자들이 '진짜 나'를 찾으라고 할 때는, 현재의 '나'를 부정하라는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나'라는 존재는 복합적으로 구성되는, 통합적인 어떤 실체다. 그래서 어떤 정체성은 부정하고, 다른 어떤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등 취사선택의 태도는 통합적 실체로서의 나를 발견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부적절한 전략이다. 그보다는 지금 나와 함께 해 온, 내면의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부터가 곧 '진짜 나'를 찾는 첫 번째 단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심리학 용어 가운데에는 자기 자비(Self-compassion)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자존감을 획득하기 위한 인위적인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수용하는 것이 오히려 자존감 강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심리학자들의 통찰이 담겨 있다.


  '진짜 나'를 찾는 노력은,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덜어내고, 부정하고, 선택하기보다는 원래 있던 것에, 마치 공을 굴려가듯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나'의 모습들을 점층적으로 더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진짜 나', '나다운 나', '참다운 나'를 찾으려는 노력은 좋다. 그러나 그것이 곧 지금 현재의 나를 부정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 번 '나'를 버린 사람은 두 번도, 세 번도 버릴 수 있다. 마치 수명이 다 된 전구를 갈아 끼우듯, '진짜 나'랍시고 좋아했다가도 언젠가 마음에 들지 않아 속절없이 버려버리고, 그때부터는 '진짜 진짜 나'를 찾으려 나서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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