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김생민의 영수증> 감상 후기(?)
위화감(違和感): 조화되지 아니하는 어설픈 느낌
몸에 이상이 생기면 우리는 위화감을 느낀다. 익숙했던 경험으로부터 무언가가 어긋난 듯하여, 불편함을 느끼는 시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내 그 위화감의 정체를 쫓기 시작한다. 과거의 나 자신과 비교하는 것은 물론, 여러 타인들과 자기 자신의 상태를 비교해본다. 그리고는 결국 의사 등 전문가를 찾고 해결책을 구한다. 그렇다. 위화감은 몸의 이상을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sign)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이상이 찾아왔을 때, 불안하고, 숨 가쁘고, 절망적이고, 우울할 때. 그럴 때도 우리는 그러한 신호를 얻게 되는가?
물론이다. 마음의 이상이 생겼을 때도 우리는 위화감을 느낀다. 그리고 마음의 위화감은 대개 시선의 불일치로부터 나온다.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사이에 온도차가 느껴질 때, 혹은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가 아닐 때. 그때가 바로 우리가 또 하나의 위화감을 경험하는 순간이며, 내 마음속에 어떤 고비가 생겼음을 감각적으로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문제는 몸의 위화감과는 그 대처방식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이다.
몸의 위화감을 느낄 때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잘못될 것을 (때로 지나치게) 걱정하고, 주위에 조언을 구하거나 약을 찾아 먹거나 병원에 가는 등 여러 가지 솔루션을 찾는다. 그러나 마음의 위화감을 느낄 때는 어떤가?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그 신호를 무시해 버리고 만다. 타인과 나 사이의 시선이 달라도, 혹은 나와 나 사이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달라도 그냥 지나친다. 왜? 이는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자기 지각(self-perception)에 관한 중대한 한 가지 착각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라는 착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화감을 새기고 마음에 오래 머물도록 놔두지 않는다. 그러나 무심결에 이루어지는 그 기만행위가 곧 우리의 마음을 더더욱 아프고 힘겹게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자기 객관화(Self-objectification)
마음의 위화감은 우리를 자기 객관화로 인도하기 위해 떠오른다. 인생 방향에, 삶의 목적 추구에 어딘가 어긋난 지점이 있으니, 미처 못 보고 지나치거나 잘못 보고 넘어간 것이 있으니 멈춰 서서 다시 한번 생각하고 고민하라는 의미를 넌지시 건넨다. 그러나 인간의 주의(attention) 및 사고의 용량은 꽤나 제한적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보며 살 수 없으며, 그럴 생각 또한 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할지 선택하며 살뿐이다.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전략'들을 받아들였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근본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 자기 고양 편향(self-enhancement bias), 내집단 편향(ingroup bias), 그리고 자기정당화(self-justification). 여기에 더해 바쁜 현대인의 일상은 이러한 '전략'들이 더더욱 매끄럽게 작동하도록, 윤활유를 들이붓는다. 그 속에 있다 보면 문득 찾아왔던 위화감은 이내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하러 돌아간다.
내담자(환자)들을 만나며 심리학자들이 가장 먼저 목표로 삼는 것은 바로 자기 객관화 기술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처한 현실을 냉정히 조망할 수 있도록 정신적 여유를 키워주는 것이 곧 그들의 일이다. 누가 봐도 '심각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외부 현실은 갑갑하게 그를 조여오는데, 그리고 그 사실을 모두가 다 아는데 정작 그에게서는 각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 때로 있다. 왜일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능력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본디 '믿을 구석'에 매몰될수록 주변을 보는 시야는 점차 좁아져가는 법이다. 소위 터널시야(tunnel vision)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순간이다. 도박꾼은 '잭팟'을 '믿을 구석'으로 삼고 그것을 향해 몰두할수록 그의 시야는 점차 좁아져가기 시작한다. 한편, 사치꾼은 과시와 허영을 자신의 '믿을 구석'으로 삼는다. '그것'만 있으면 괜찮다, 혹은 언젠가 '그것'만으로 모든 불편을 보상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등은 끝내 그를 참담한 현실 속으로 밀어 넣고 만다.
주섬주섬 스스로가 처한 현실을 하나씩 그러모으면서 느낀 것은 다름 아닌 위화감이었으리라. 나와 다른 타인들의 시선을 받아내며 느끼는 서늘함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위화감이 이번에는 편향과 정당화로 흩어지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현황을 점검하고 앞으로 가고자 하는 길을 다시금 새롭게 정비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자기 객관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자기 객관화의 과정을 오롯이 스스로에게만 내맡기지 않으려 한 것 또한 긍정적인 부분이다. 사실 자기 객관화 작업이란 혼자 하기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혼자서는 자기 객관화 작업을 망쳐버리기 쉽다. 이렇다 할 근거도 없는, 미래의 가능성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현재의 냉정한 상황 분석과 조망들을 뭉개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래서일까. 김생민 씨의 처방은 그야말로 놀랍다. 인생의 조감도를 그리되, 다양한 생각을 가진 여러 외부인의 시각을 가감 없이 빌려와 궁극적으로 결과물에 객관을 더하는 길을 제시했으니 말이다. 자기 객관화 과정이 가진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처방이라 할 것이다. 단지 한 가지 더 보태고 싶은 말은, 자기 자신을 개방하는 과정이 꼭 급진적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급격한 노출과 변화는 저항과 자기 파괴,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의한 종속을 불러오기 쉽다. 외부의 시선을 받아들이되 과유불급으로 끝나지 않도록, 그 과정을 애써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국 자기 객관화를 이끌고 완성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