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은 그저 '공감자료'인가?
2018년 4월 13일 금요일. 맞다. '13일의 금요일'이다. 서구 사회로부터 유래된, 불길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바로 그 날이다. 심리학 전공자로서 한 번 호기심을 가져 본다. 물론 '13일의 금요일'이 어떤 마술적인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날만 되면 이계에서 악마가 내려오는 것도, 귀신이 활동하기 좋은 기운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리라. 다만 궁금한 것은 사람들이 왜 '13일 금요일'에 관심을 갖게 되느냐는 점일 것이다. 먼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13일의 금요일을 둘러싼 괴담, 분명 과학적인 어떤 실체가 입증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 날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것일까?
Q. 사람들이 13일의 금요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음… 사람들이 자꾸 그걸 '의식'하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오늘은 13일의 금요일이다'라고 의식하게 되니, 평소보다 더 촉각을 곤두세우게 될 거예요. '오늘 불행한 일이 일어나나, 안 일어나나' 하고요. 그런 상태에서 행여라도 불행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더욱더 기억에 잘 남게 되겠죠. 그리고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싶은 정보만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잖아요? 분명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13일의 금요일도 있었을 텐데 그때의 기억은 깡그리 잊고, 공교롭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던 13일의 금요일만을 떠올리려 하기 때문에 그 괴담에 대해 더 진지해지는 것 같아요.
굳이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조금 진지하게 고민해본다면 누구나 위와 같은 생각을 해볼 법하다. 사실 '13일 금요일'을 둘러싼 고정관념에 대해 심리학이 내놓을 수 있는 답변도 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 몇 가지, 참고하면 좋을 심리학 개념들이 존재한다. 먼저 선택적 주의(selective attention), 그리고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의 관점으로 접근해볼 수 있다(자신이 '원하는', 혹은 '눈에 잘 들어오는' 정보만을 취사선택하여 그것을 판단 준거로 삼으려는 경향을 지칭하는 심리학 개념들이다). 13일의 금요일만 되면 나타나는 어떤 신비한 힘이 존재하지 않는 한, 불행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빈도는 13일의 금요일이나 다른 날들이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무서워하면서도 공포 영화를 즐기듯, 13일의 금요일을 둘러싼 괴담을 '즐기고 싶다'. 그리고 그 괴담을 더 재밌게 즐기기 위해서는 그것이 전적으로 '허구'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13일의 금요일에는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는 생각을 뒷받침해줄 '증거'들을 부지런히 수집해 나가기로 한다. 실제로 불행한 일이 일어난 사례가 있으면 그것을 머리 속에 담는다. 그러나 13일의 금요일임에도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건 기억에 담아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 시시하니까.
그렇다면 13일의 금요일 괴담을 뒷받침하는 여러 '증거'들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고정관념 위협(Stereotype threat) 연구들을 참고해보면 어떨까. 고정관념 위협이란, 고정관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머리 속에 고정관념의 내용이 활성화되면 과제 등에서의 수행 능력이 저하되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면, '흑인은 백인에 비해 지능이 낮다'라는 고정관념을 의식하는 흑인 학생들은, 실제로 통제 집단에 비해 더 낮은 성적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Steele & Aronson, 1995). 왜 그럴까? 불안, 내집단 동일시 등 여러 설명들이 존재하지만 특히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인지적 관점에서의 설명이다. 해당 관점에 따르면 고정관념 위협은 작업기억(working memory)의 용량 한계 때문에 일어난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이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한정적이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에 정신적 에너지를 오로지 쏟아야만 기대하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터인데, '고정관념'이 작업기억 내부로 은근슬쩍 끼어든다면? 고정관념에 대한 정보 처리를 위한 별도의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되어야만 하는 불상사가 생겨난다. 물론 '13일의 금요일에는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는 고정관념이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당사자는 없다. 그러나 고정관념의 위협의 전형적인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13일의 금요일에 대한 고정관념 역시, 한 번 머리 속에 의식되기 시작하면 무시하든, 받아들이든, 이유를 찾든, 합리화하든 어떻게든 '처리'가 되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본래 하던 일에 대한 주의(attention)가 낮아지게 되고, 평소보다 '안 좋은 일'이 생길 가능성이 다른 날보다 높아지게 된다.
용어들을 섞어가며, 그리고 연구 논문을 끼워가며 설명했지만 구구절절 너무 길어진 듯한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결국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이 글의 앞부분에서 제시한 문답 속 누군가의 답변 속에 다 들어 있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심리학적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내용들이다. 단지 '다른 언어'로 쓰여 있기 때문에 일견 신선하고 그럴듯하다는 느낌을 갖게 될 뿐.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심리학이 대중을 만날 때 흔히 마주하게 되는 한 가지 딜레마를 발견하게 된다.
최근 흥미로운 심리학 연구 결과를 다룬 기사가 포털에 소개되었다. "나이 든다고 반드시 현명해지는 건 아니다(연구)"(링크)라는 제목의 기사였는데 약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수행된 미국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 인간 행동의 미묘한 차이를 묻는 약 40가지 질문들에 대해 노인들이 젊은이들보다 더 나은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기사를 보고 난 누리꾼들의 반은 다음의 두 가지 유형으로 엇갈렸다. 공감 대 '당연하다'
사실 '당연하다'는 반응에 대해서는 심리학 전공자로서 할 말이 좀 있긴 하다. '당연해 보이는 연구'들이 어떤 가치를 갖는가에 대해, 그리고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 말이다. 가령 잠정적 사실들의 무수한 '누적'을 통해 만들어지는 과학 속성의 문제, 일반화의 문제, 데이터에 기반한 경험적 증명의 문제, 사후 과잉 확신 편향(hindsight bias) 문제, 심리적 메커니즘(psychological mechanism)의 문제 등등.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연하다'는 여론을 함부로 비판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사실 심리학 연구자도 아니고, 단지 일상의 흥밋거리로 심리학을 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굳이 위에 언급한 문제들을 고려해야 할 '동기'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조금만 더 솔직해져야 할 듯싶다. 심리학 연구 기사들을 볼 때마다 아무리봐도 '새롭다'라고 느낄만한 구석이 잘 안 보이긴 하지 않던가. 나도 모르게 '당연하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걸 어찌하리.
심리학자들이 종종 TV나 신문 등에서 인터뷰를 하는 경우도 본다. 현재 이슈가 되는 사회 현상에 대해 '전문가의 의견'이라며 심리학자들의 인터뷰를 짧게 싣는 경우들이다. 그런데 '전문가의 의견'을 들으며 무릎을 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 굳이 심리학 전문가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당연한' 말일 때가 많으니까. 사실 그걸 기대하는 독자, 시청자들도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기실 들으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교수, 연구원 등 전문가 타이틀을 달고 있는 '권위자'가 하는 말이니까, '정말로 그런가 보다' 싶은 생각이 들게 될 뿐이다. 전형적인 '권위에의 호소' 전략이다. 최근 대한민국의 고독지수에 대한 심리학자 대상 설문조사 결과를 다룬 기사가 있었다(링크). '심리학자'가 하는 말이니까 그럴듯하긴 한데, 사실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당연한 소리'를 한다며 심리학을, 심리학자를 비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기사 등 제한된 형식 내에 담으려다 보니 보다 전문적이고,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담기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다. 심리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상 온갖 유사과학들이 판을 치고, 그러다 보니 학계와 대중 사이의 거리가 상당하여 오해가 자주 발생하는 것 또한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현재 심리학이 대중사회에 소비되고 있는 방식이 너무 '공감' 위주로만 흐르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이 심리학 기사 보고 '와 그랬구나! 난 몰랐는데!' 하는 경우보다, '맞아, 정말 그래' 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이는 것은 어찌 되었든 사실이다. 물론 사람들은 공감이 가는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자주 등장하는 유형이 바로 '공감 소재'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심리학 기사를 단지 '공감'하려는 목적으로만 클릭하지 않는다. '과학'이고, '연구결과'이기 때문에 단순 공감을 넘어 기존에 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기를 기대하고 클릭 버튼을 누르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런 기대의 좌절 때문에 '당연한 걸 왜 하냐'는 비아냥이 터져 나오게 된다(물론 여기에는 언론 기사 제목의 '선정성'도 한몫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과연 심리학(자)들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묵묵부답이다. 국내의 학계, 제도 교육 기관 등 심리학자들이 주로 머무는 고유의 영역이 있고, 그 안에서 서로 이해하며 잘 지내면 된다는 입장을 암묵적으로 고수하고 있는 듯하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새롭지 않았다면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다
심리학자들도 억울하다. 논문 하나 내기 위해 가장 오랜 시간 투자하는 지점이 바로 '새로운 연구 아이디어 발견하기'다. 반복 검증(replication) 연구라고 따로 표방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 해야 할 연구는 분명 기존 누적되어 온 연구 내용들과는 달라야만 한다. 그 차이가 크든 적든 어쨌든 달라야만 한다. 안 그러면 그 연구는 빼도 박도 못하게 표절이 된다. 그래서 하나의 논문이 나오기까지 동료 연구자들이 가장 주의 깊게 살펴보고 비판하는 부분도 바로 이 연구의 독창성에 대한 부분이다. 새롭게 밝혀낸 것이 없다면 그 연구는 뭣 하러 했느냐는 말을 듣기 쉽다. 요약하자면 하나의 연구 논문이 나오기까지,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가 갖는 독창성에 대한 많은 고민과 비판들을 겪게 된다. 그런데 왜 언론에 소개되는 심리학 연구 논문들은 하나같이 '당연하게' 보이는 것인가? 왜 '이 뻔한 걸 뭐하러 연구랍시고 하고 있냐'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인가? 이는 전달 과정에서 분명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다.
그런 이유로 나는 새로움이 묻히지 않도록, 그것을 발굴하고 그 함의(implication)를 왜곡 없이 전달해줄 수 있는 중간자적 존재가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학계와 대중 간 다리를 놓는 작업이기에 '언어'는 분명 달라져야 한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새로움을 느낄 수 있게끔, 심리학적 발견들을 전달해나가는 역할. 단지 '공감자료'로만 전락하지 않도록 대중이 당연하다, 뻔하다고만 느끼지 않도록 '완급 조절'을 해내는 역할. 말로는 쉬워 보여도 실제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 될 것이다. 과연 누가, 어떻게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인가? 부디 일반 대중을 위한, 미국의 심리학 전문잡지 <Psychology Today>와 같은 매체가 국내에도 많아졌으면 하는 소망이다.
** 참고문헌
- Steele, C. M., & Aronson, J. (1995). Stereotype threat and the intellectual test performance of African American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69(5), 797-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