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허들 낮추기
칼퇴를 하게 됐을 때는 좋았다. 사무실 문을 나서고 복도 바깥 창문을 보니 아직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는 그 어떤 일정도 마련해둔 것이 없었다. 1분 1초가 아까우므로, 부리나케 집으로 들어가 나만의 소중한 시간을 즐기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집으로 향하며 이내 근심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참, 어떻게 보면 사치스러운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남들은 칼퇴 못해서 난리들인데, 툭하면 하던 일 놔두고 칼퇴해대는 주제에 이런 고민거리가 웬 말이냐.
오늘은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까?
할 게 없다. 막상 집에 가도 할 게 없다는 사실이 '칼퇴의 행복'을 앗아가곤 했다. 내가 집에 놔두고 온, 가슴 두근두근하게 할 그 뭔가가 없었다는 사실이 허무했다. 집에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으며 곰곰이 생각해봤다. 평소 내가 뭘 하며 퇴근 이후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가. 몇 가지 늘 무미건조하게 집어 들던 선택지들이 스쳐간다. 딱 넷플릭스, 유튜브, 게임. 그전에 씻고 저녁 먹기. 와… 정말 너무한다 싶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내 '여가 활동'의 목록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대학생 시절에는 친구들 자주 만나 술도 마시고, PC방도 가고 그랬다. 적어도 혼자 있으면 그렇게 심심하진 않았다. 이제는 야근 때문에 안 된다, 아내가 기다리고 있어 안 된다, 하는 통해 친구들 얼굴 본지도 한참 됐다. 그때는 혼자 집에 가던 날, 종종 옆길로 새어 본 적도 있다. 늘 타던 버스, 지하철 안 타고 팟캐스트 잔뜩 다운받아 들으며 걸어간다든가 하는 등등. 그런데 이제는 그럴 기운이 도통 나질 않는다.
'재밌다'는 말을 할 때의 그 느낌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본 일이 있다. 행복한 삶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적어도 재미있게 산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그런 감각을 느껴본 지가 오래인 듯하다. 이제는 재밌다는 것이 어떤 감각이었는지 책에서나 보고 이해해야 할 판이다. 과연 '재밌다'는 느낌은 뭘까? 그것을 느끼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넷플릭스, 유튜브, 게임을 버리고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그런 새로운 재미를 좇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활동을 선택해야 하는가? 테이크아웃 치킨집에서 사들고 온, 크리스피 반 간장 반 치킨으로 말초적인 쾌감을 좇으며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발상 하나가 있었다.
요 재미라는 감각이 어디에서 오곤 했는지를 되짚어봤더니, 그간 내가 재미있다고 평했던 일들을 시작할 당시, 그것들이 재미를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실행에 옮긴 기억은 정작 없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했던 일이 실제로 재미있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지, 이것을 하면 무조건 재미있다는 확신을 얻고 뛰어든 적은 별로 없었더라는 거다. 사실 재미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고자 하는 이 일이 재미있을지, 재미없을지 당장 시점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굳이 해 봐야만 그게 재미있는 일인지,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당장 내가 이 일이 가져다줄 재미를 '확신'하고 있지 못하는 바로 그 상황이야말로 본질적으로 그 일을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중요 전제가 아니었을까?
재미는 불확실성에서 온다.
2018년 4월, <어벤져스: 인피니티워>(이하 '인피니티워')가 개봉됐고, 어마어마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인피니티워가 개봉될 당시 인터넷 세계에서 벌어진 일들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무척 흥미진진하다. 개봉일 전후로 거의 모든 인터넷 세계에 '비상경계령' 및 각종 경고성 문구들이 난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왜? 원흉은 바로 '스포일러'였다. 인피니티워에 대한 모든 글에는 반드시 스포일러 유무가 적힌 꼬리표가 붙어야만 했고 그 규칙을 지키지 않은 이들과, 실수로 클릭했다 스포일러 당해버린 '피해자'들의 싸움은 무척 격렬했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아직 <아이언맨1>을 제외하고는 마블 영화를 본 적이 없었고 이번 인피니티워에 대해서도 당장은 큰 관심이 없어 비교적 초연하게 이 사태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해봤다. 스포일러가 왜 이토록 문제가 되는 것일까, 하고.
사실 답은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다. '알고 나서 보면'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상태, 즉 불확실한 상태에서 전해지는 충격을 얻고 싶어 한다. 왜? 그런 조건에서 오는 자극이야말로 진정으로 재미있고, 행복한 경험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미루어 생각해보건대, 어쩌면 우리들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도 그런 규칙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행복하려면, 재미있으려면 앞으로 우리가 할 일들에 대해 스포일러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 아직 잘 모르는 상태에서 '당해봐야' 신선한 매력도 발견하기 쉽고, 적극적으로 머리 굴려 대처하느라 '재미없어할 틈'을 미처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에서 뻔히 예측 가능한 일들만 한다. 예측 가능하지 않더라도, 예측 가능한 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내가 약 10년 전 심리학 대학원 진학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던 것은 사실 대학원 생활의 '실체'를 잘 몰랐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하는 바도 크다. 뭣도 모르니 그저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다. 대학원에 가서 연구한다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판타지들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학원이 어떤 곳인지 부지런히 사전 조사를 하고, 현직 대학원생들의 조언도 듣고, 실제 어떤 연구들이 이뤄지고 있는지 연구 논문들을 들여다보고 하는 등 '대학원 생활의 스포일러'를 몽땅 뒤집어쓰고 나니, 대학원 생활에 대한 기대감도 전과 같지 않았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스포일러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어찌 보면 현실적으로 그럴듯한 선택이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려 해도 불확실성에서 오는 재미 찾자고 시장조사나 업계 현실 공부를 등한시할 수는 없다. 그런데 웬걸, 사업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 일인지, 현실을 알아갈수록 처음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을 때의 그 설렘'이 자꾸 줄어만 간다. 그러다 보면 행복하자고 시작했던 일이 더 이상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 아니게 되어 버리고 만다. 과거 고3 수험생 시절, 친구들의 책상 한 켠에 보면 이런 메모들이 붙어 있었다. '대학에만 가면 자유롭게 놀러 다닐 수 있다.', '내 수능 성적은 미래 배우자의 외모와 비례한다', '대학에서는 마음껏 연애할 수 있다' 등등. 실제 대학생활이 어떤 것인지 '스포일러'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기대였고 그런 이유로 충분한 동기부여가 될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대학생활의 실체를 몰랐으므로, 대학에 가서는 더 당황했을 거고 더욱 하루하루가 스릴감 넘쳤으리라. 그래서 더욱 잊을 수 없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러나 낭만적인 대학 생활의 추억'으로 머리 속에 남게 되었으리라. 결과야 어찌 됐든.
행복에 대한 허들을 낮추는 것은 어떨까?
사실 그런 생각을 한다. 인생 어떤 영역에서건 마찬가지다. 스포일러 당한 영화가 재미없듯, 지나치게 많이 알아보고 가려는 길은 본질적으로 재미가 없다. 많이 알아놔야 실패하지 않는다는 그 기분은 이해하지만, 역설적으로 안전할 때보다는 그렇지 않을 때 인생의 스릴감은 더 넘친다. 그래서 생각한다. 재미있는 일을 찾고자 한다면? 그 일에 대해 '재미있다'는 확신을 가지려 애쓰기보다는, '재미있겠다' 정도의 적절한 호기심이면 된다. 재미있'겠'으면 뛰어들자.
확신을 가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떼던 이전보다야 분명 '재미없을 리스크'가 크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지도 않다. 재미에 대한 확신을 갖고 뛰어들려면 많은 시간과 고민이 필요하기에 상대적으로 내가 시도해볼 수 있는 기회는 제한된다. 그러나 적당히 알아본 후, 재미있겠다는 판단이 들 때 주저 없이 뛰어들겠다는 전략을 선택한다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내가 시도하는 일의 종류가 더 많을 것이며 따라서 기대할 수 있는 '재미'와 '행복'의 총량 또한 높아질 것이다. 결국 행복에 대한 '허들'을 낮추는 것이, 우리의 높은 기준을 일정 부분 양보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재미와 행복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런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