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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날에는 결계를 쳐요

사내 단톡방이 없어지고 있단다

  A는 일주일 중 닷새를 산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그러다 이틀이 지나고 나면, 언제 사라졌었냐는 듯이 다시 나타나 태연히 자기 할 일을 한다. 왜 매주 이틀씩 꼬박꼬박 사라지는지, 그 이유가 무척 궁금하다. 그래서 B가 물었다. 왜 A 당신은 닷새 동안만을 사느냐고. 그러니 A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쉬는 날에는 휴대전화를 잘 보지 않는 편이라서요.







  직장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평일이든, 주말-휴일이든 굳이 구분하려들지 않았다. 전화가 울리면 받았고 까톡이 울리면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1'을 없앴다. 오히려 주말-휴일이면 더 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놀 수 있는 반가운 날인데 집에만 있는다는 것이 웬 말이냐. 그런데 나이가 들고 직장인이 돼서 살다 보니 사정이 달라졌다. 일을 하는 날과 휴일은 엄격히 분리되어야 한다. 찌든 피로를 달래야 하는 휴일에 누군가 내 '영역'을 침범한다는 것이 이리도 불쾌한 일인 줄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오래전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 본, 어느 '오덕후'의 전설적인 일화를 떠올렸다.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려 하니 'AT 필드!!' 하며 결계를 치려했다나. 그래, 바로 딱 그 심정이다. 금요일 밤에 직장을 나서는 그 시점부터 내 주위에 결계를 하나 쳐 두고 싶은 그런 심정이다.


  그러나 많은 직장인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AT 필드'는 커녕, 까톡 전파 하나 제대로 못 막아서 퇴근 시간 이후에도 아주 죽을 맛이란다. 직장 상사가 개설한 '단톡방'에 날아드는 각종 업무 내용 때문에, 퇴근 이후 즐거웠던 기분이 흩어지고 이내 스트레스와 걱정, 불안에 몸서리를 치게 된단다. 평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리 시달리는데 주말-휴일 만큼이야 철저히 휴대전화 던져 놓고 사는 게 뭐 그리 대수일까. 평일과 주말-휴일을 분명히 구분하는 것은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다. 그래서 '눈치 없이' 주말-휴일에 업무 관련 문자, 메일, 까톡 날려대는 사람들이 참 밉다. 그 최소한의 결계마저 뚫고 들어와 기어이 나를 괴롭히려 하니. 평일 매일 1시간 동안 주어지는 점심시간에 업무 관련 연락 날려댈 때도 참았는데, 쉬는 날에까지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흐아.... 온전한 자유를 원하노니



단톡방 없던 시절에도 다 일 잘하고 살았다.



  최근 기사에 따르면 업무 얘기가 오가는 사내 단톡방을 없애는 회사가 늘고 있다 한다(링크).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을 무너뜨리는 주범이 바로 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려대는 사내 단톡방 아니었던가. '그거 없으면 어떻게 일 지시하냐'고 상사들은 아우성이지만 정작 지시를 받는 아랫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내 단톡방을 없애고 나니 스트레스도 덜고, 감정 노동도 덜 하며, 오히려 업무 효율이 높아졌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사내 단톡방 그거 없다고 해서 당장 회사에 큰일이 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왜 그리 우리는 사생활 가득한 이 까톡마저도 업무용으로 쓰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던 것일까.


  메신저에는 내 사생활이 들어 있다. 일상에서 가족과, 친구와, 연인과 주고받는 친밀한 대화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 대외적으로 꺼내어 놓을 수 없는, 나만의 속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게다가 휴대전화를 바꿨다거나 술김에 극적인 결심을 한 것이 아니라면야, 채팅창 목록을 주욱 내려가다 보면 내 오래전 생각과 고민들 또한 그대로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지나간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아까워서' 잘 지우지 못하고 놔둘 때가 많다. 한편, 연애 도중 서로 간에 다툼이 일어나는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상대방의 휴대전화 속 까톡 메시지를 확인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메신저는 은밀하다. 사적인 정보들이 가득한, 적어도 절반 이상은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들의 공간이다. 그런 공간에 업무 등 공적인 업무 지시가 끼어든다면? 흡사 숨기고 싶은 무의식을 들킨 기분일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친절하게 업무 지시를 하든 상관없다. 문제는 비밀의 공간에 침범하는 행위 그 자체이니 말이다. 물론 메신저 외 메일이나 문자, 전화 등도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사생활을 담고 있기에 업무 시간 외에는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경계의 대상이다. 그러나 내 사생활이 얼마나 깊게 묻어있나, 를 따져본다면 각 매체가 동등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왠지 느낌상, 담겨 있는 사생활의 폭과 깊이가 거대할수록 침범당했을 때의 스트레스는 더 커지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전화 > 메신저 > 문자 > 메일 순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는 업무 관련 연락의 피곤함은 더 컸다.



빨간 날에는 업무 관련 메일, 전화, 메신저, 문자를 받지 않습니다.



  야근을 밥먹듯이 하다 보면 공적인 시간과 사적인 시간 간 경계는 모호해진다. 아니, 내가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당장 해야 할 일이 가득인데 주말이고 나발이고 그런 '사치'가 웬 말이냐. 마땅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어야 할 날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편히 쉬지 못하는 그런 슬픈 습관을 갖게 된 사람들이 주변에는 참 많다. 휴일에도 연락받고 일 해주고 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오히려 타인의 쉴 권리를 침해한 이들이 목소리를 높여 훈계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주말, 휴일이 어딨냐고. 그렇게 쉴 거 다 찾아 쉬어서야 언제 인정받고, 부자 되어 잘 살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빨간 날에는 'AT 필드'라도 치자. 일 안 한다고 용기 내어 말하자. 그러나 아직 사회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은 관계로, 너무 당당하기는 어렵다면 적어도 쉬는 날 들어온 모든 일을 다음 날로 넘기는 여유라도 부리자. 아마 경험으로 다들 알 것이다. 휴일이어도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쉴 수 없기에, 이따금씩 다음날 출근하고, 밀린 일 할 생각에 금세 우울해지고 쉬어도 제대로 쉬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 말이다. 그리고 매주 그렇게 잘 못 쉬다 보니 피로가 누적된다는 생각에 더 침울할 것이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의 빨간 날을 좀 지켜주자. 빨간 날에 잠수 좀 탄다고 서로에게 뭐라 하지 말자. 부디 사내 단톡방의 폐쇄가 끝이 아닌 시작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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