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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를 다시 보다

행동주의(Behaviorism)의 과거와 현재

  프로이트나 융이 활발하게 주도했던 정신분석학의 흐름,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만들어진 최초의 심리학 실험실 등 심리학의 초기 역사를 수놓았던 굵직한 사건들의 바탕이 되는 곳은 유럽이었습니다. 가령 정신분석학은 오스트리아나 스위스 등지에서 활발했고, 빌헬름 분트가 실험실을 만든 장소는 독일이었습니다. 때문에 당시 심리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자연히 유럽으로 유학길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심리학의 저변이 점차 넓어져가면서 다른 나라에서 유학을 왔던 학자들은 점차 심리학을 모국으로 들여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학자들 역시 자신들이 유럽에서 경험했던 심리학을 자국에 소개하는데 여념이 없었죠.


  그러나 미국에서 발달된 심리학은 유럽에서의 심리학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미국의 초기 정착 시절, 미국 사회를 지배했던 실용주의(Pragmatism)와 심리학이 만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심리학이 아직 과학(Science)의 한 분야로 정립되지 않고, 다분히 철학적인 색채를 띄고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 유럽에서 이어져 온 심리학의 흐름이었지만, 미국으로 도입되면서 '심리학은 과학이다'라는 인식이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즉 무의식이나 원초아/자아/초자아, 원형(Archetype) 등 분명한 실체가 모호하고 과학적인 검증이 어려운 개념들은 점차 퇴색되어 갔고, 정신물리학적 측정과 분석이나 동물 실험 등에 기반한 연구들이 심리학의 주류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적 심리학'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대표주자가 바로 행동주의(Behaviorism)입니다.


  행동주의는 인간을 오로지 '자극과 반응'의 집합체로 이해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잡히지도 않는, '마음'의 존재를 배제시킨 채 오로지 인간이 외부로부터 오는 다양한 자극들에 따라 반응하는 존재임을 가정한 겁니다. 스키너 상자(Skinner box)는 이러한 행동주의의 관점을 상징합니다. 실험자는 실험 대상에 가할 다양한 형태의 외적 자극들을 준비하고, 자극에 따라 대상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체계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겁니다. 실제로 이러한 행동주의 심리학은 심리학계에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바람직한 행동을 습관화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소거하는 등의 강화/처벌의 메커니즘 규명에도 공헌하였고 자극과 반응의 연합이 엇나가면 미신(Superstition) 행동이 일어날 수 있음을 실험을 통해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스키너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한편 행동주의가 직면한 비판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른다면 인간은 오로지 '자극-반응'의 틀 안에서 움직입니다. 하지만 동일한 외부 자극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사람마다의 반응은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행동주의는 이 점에 관한 충실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가 외부 자극으로부터 반응만을 인출하는 그런 수동적인 존재일 뿐인지, 인간은 자유의지가 결여된 존재인지 등 행동주의의 기본 전제에 관한 비판도 줄을 이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마음을 심리학 연구 안으로 들여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은 계기가 된 인지혁명을 기점으로 행동주의의 위상도 추락하고 맙니다.


  오늘날 상당수 심리학 담론들에서는 행동주의를 지나간 역사의 일부로 다룹니다. 초기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파격성과 그들의 공헌 등은 인정할 부분이지만 정작 인간의 마음을 심리학으로부터 배제시켰다는 한계점 덕에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는 식으로 행동주의에 관한 설명이 마무리됩니다.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잘못된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부분만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지혁명 이후, 행동주의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행동주의적 관점은 현재의 심리학 속에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오히려 초기의 '자극-반응' 모델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관점들과의 타협과 공존을 겪으며 보다 성숙해진 상태로 말입니다.


  심리학자 Lewin은 '인간의 행동(B)이란 환경(E)과 개인 내적 요인(P) 간의 함수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의 성격이나 의지 등의 개인 내적 요인만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의지가 충만해도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나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주위 환경에 의해 행동이 특정 방향으로 유도될 수도 있습니다. 즉 때로는 개인 내적 요인들보다, 환경이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사회심리학에서 가장 잘 알려진 실험 가운데에는 구직 장면에서 면접관이 따뜻한 온도의 물컵을 쥐느냐, 차가운 온도의 물컵을 쥐느냐에 따라 면접자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례가 있습니다. 자세한 심리적 기제에 관해서는 지금 다루지 않겠지만, 결과적으로 물컵의 따뜻한(차가운) 온기가 면접관의 마음도 따뜻하게(차갑게) 만든 겁니다(실제로 이 실험은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즉 '물컵의 온도'라는 외부 자극에 의해 인간의 행동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유도되었습니다. 이는 외부 자극의 중요성을, 곧 행동주의적 관점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 할 것입니다. 그밖에 매장 내 물건의 배치 형태, 종업원의 태도, 흘러나오는 음악이나 공간 내 온도나 인테리어, 색, 구조, 동선 등등 소비자의 구매 결정 가능성을 높이고자 소비자를 둘러싼 외부 자극들을 교묘하게 설계하는 최근의 마케팅 기법들 또한 인간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지 않고도 외부 자극으로 어떻게 인간의 행동을 의도된 방향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따뜻한 커피는 우리의 마음도 따뜻하게 만들어 줍니다




  스키너의 소설 <월든 투>는, 인간을 둘러싼 외부 조건들의 조작을 통해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삼고 있는데, 우리가 이 소설에서 짐작해야 할 것은 어느 과격한 심리학자의 허무맹랑한 이상향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행동주의는 계속 진화해 왔습니다. 오늘날 점화(Priming)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 그야말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갖가지 찰나의 자극들이 우리의 행동을 어떻게 조종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결국 스키너의 주장은 다소 거칠고 과격해 보일지언정 마냥 꿈같은 일만은 아닙니다. 그 끝이 무기력이 지배하는 통제 사회인지, 자유 의지가 남아 있는 사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인간이 의지와 관계없이 외부 자극들에 무력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은 우리가 스키너로부터 얻어야 할 중요한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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