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은 왜 부담스럽고, 어려운가?
왜 자꾸 썼다, 지웠다 하게 되는가?
첫 줄을 쓰기까지 왜 그리 오래 고민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는가?
글쓰기의 어려움은 한 번이라도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이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나 고통스럽다. 글쓰기와는 별 인연이 없었던 초보 작가에게도, 이미 여러 권의 책을 내 본 경험이 있는 전문 작가에게도 글을 쓰는 일은 솔직히 고역이다. 단지 글을 쓰고 나서의 그 뿌듯함, 성취감, 혹은 외적 보상이 있으니 글쓰기를 손에서 놓지 않을 뿐, 한 번도 글쓰기가 수월했던 적은 없었다.
글을 써 온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여전히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렵고 부담스럽고 자신 없는 활동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재주는 있었던지 어렸을 때에는 백일장 대회 여럿 나가봤고, 습작 소설로 상도 타봤고, 서술형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는 일이 많았다. 대학원에서 논문과 보고서도 좀 써 봤고, 사회에 나와서는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글쓰기란 정말 신기한 활동이다. 많이 쓰다 보면 좀 요령도 붙고 수월해질 줄 알았는데 별로 그렇지가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몇 권이라도 책을 내 봤으니, 이제는 조금 글쓰기가 편해질 법도 한데...
글쓰기는 왜 힘들까? 사실 글쓰기의 부담을 낮출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다음과 같은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딱 한 글자만 빼는 것이다.
글을 잘 쓰자. → 글을 쓰자.
글을 쓰는 건 사실 어렵지 않다. '잘' 쓰기를 포기하면 아무리 긴 분량이라도 순식간에 채울 수 있다. 지금부터 '잘' 쓰기를 포기한 필자의 글을 한 번 감상해 보자. 아래 내용에도 적었지만 꽤 긴 분량이라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저 내용을 적는 데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1분이 뭔가, 30초도 안 걸렸을 것이다).
글을 잘 쓰리고 쓰려고 결심하고 처음으로 쓰는 글ㄷ이다. 결심하려 했지만 여전히 첫 줄이 어렵긴 해따. 벌써 첫 줄에 오타가 몇 개나 발생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벌써 두 줄을 다 썼고 세 줄째에 돌입하고 있다. 이 말을 쓰는 사이에 네 줄이다. 벌써. 이렇게 많이 빠른 속도로 쓴 게 정말 오랜만인거 같다. 하지만 물로 낭로 난 알고 있다. 이 글에, 지금 쓰고 있는 이 문단에 영양가 따위는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일단 이렇게 토해놓고 나면 뭐라도 건질 내용이 있지 않을까? 그래, 적어도 아무 생각 없이 잘 쓴다는 생각을 버리고그냥 쓰다보면 이렇게 뭐든 분량이 나오고 글을 만힝 쓴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는 점에소 아무 위미 없는 행위는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사실 정말 영양가 없어보이지만 난 이 내용을 쓰고 싶었다. '잘' 의 부담을 버ㅗ린다면 누구나 긴 글을 죽죽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놀랍게도 이 문단을 쓰는 데 걸린 시간보다, 이 문단 앞에 길게 써놓은 인트로, 공감 내용, 제안 내용이 더 오래 걸렸다. 난 여기서 더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더 적으면 사람들이 아무도 안읽을 것 같고 지루해할 것 같아서 이만 줄이고자 한다 이제 '잘'쓰는 맥락으로 다시 돌아와보자.
놀랍게도 '글을 잘 쓰자'에서 '잘'만 빼도 글의 분량이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잘'이라는 녀석 때문에 지금껏 글쓰기로부터 고통을 받아 온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잘'이라는 표현의 의미와 중요성을 고려하여 특별히 다음과 같은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바로 완벽주의perfectionism 라고 말이다.
우리는 '잘'이라는 녀석을 너무 과소평가한다. '그냥 글을 잘 써야 한다는 거지 뭐', '잘 쓰자, 는 말에 뭐 별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심리학자들은 '잘'이라는 단어 속에는 정말 많은 의무, 부담, 조건들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비록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잘 써야 한다(해석)
= 맞춤법이 다 맞아야 한다
= 오탈자는 없어야 한다
= 문장의 주어와 서술어가 상호 부합해야 한다
= 흥미로운 intro가 필요하다
= 문제 제기 - 대안 제시 - 근거 - 결론 등에 이르기까지 '빌드업'이 치밀해야 한다
= 예상 독자들의 입맛에 맞춰야 한다
= 재미있는 글이어야 한다
= 유용한 글이어야 한다
=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글이어야 한다
= 나만의 생각이 담겨 있어야 한다
=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 유기적으로 글의 구성이 짜여 있어야 한다
= ...
우리는 놀랍게도, 저 수많은 의무, 부담, 조건들을 '잘'이라는 한 음절에 압축시키곤 한다. 글을 쓰자, 글을 잘 쓰자, 비록 단 한 글자 차이지만 실제로 글 쓰는 입장에서 받아들이게 되는 의미는 무척 다를 수밖에 없다. 당연하겠지만 완벽주의적 성향이 더 강할수록 '잘'이라는 표현에 들어가는 조건들은 더 많아지게 된다.
도대체 왜 우리는 글을 쓸 때 '잘'을 데려오게 되었을까? 왜 '잘'은 저토록 많은 의미와 조건들을 짊어지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존재하겠지만 완벽주의, 특히 사회적으로 부과된 완벽주의socially prescribed perfectionism를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글쓰기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에 주목한다. 생각해 보자. 아직 어렸을 때, 우리가 생애 최초로 접하게 되는 글쓰기는 바로 평가를 위한 글쓰기이다. 처음부터 글쓰기에 '평가'가 따라붙다 보니, 우리들 마음속에서는 '글쓰기란 이런 것이구나', '원래 글쓰기는 평가받기 위한 것이구나'라는 비합리적 신념irrational belief이 깃들기 시작한다.
글자 따라 쓰기 - 선생님 검사 받기
받아 쓰기 - O, X 매기기
독후감 쓰기 - 검사 받기
그림일기 쓰기 - 일기 검사 받기
감상문 쓰기 - 검사 받기
백일장 대회 - 입상 하기
주관식 시험 - 채점 받기
청소년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성인 작가가 돼서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다. 십중팔구 우리가 쓰는 글은 모두 '평가'받을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다. 그러니 글을 쓰면 안 될 수밖에. 글을 '잘' 쓸 수밖에.
학교 리포트 - 수행 평가에 반영, 내신에 반영
논문 작성 - 교수님의 심사, 게재 기관의 심사, 세간의 평가, 임팩트 팩터, 인용 횟수
연구 보고서 - 심사기관 의견, 클라이언트 의견, 연구비의 책정
기획안 - 동료의 리뷰, 상사의 평가, 사장님 전결
책 쓰기 - 편집자의 평가, 독자들의 평가, 매출/인세
SNS에 글 쓰기 - 독자의 '좋아요', '댓글', '구독', 홍보 효과
우리는 평가받지 않을 글을 써 본 적이 없다. 여러분이 브런치 스토리를 시작했던 이유는 평가받지 않을 글을 쓰기 위한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가? 막상 그러자니 구독자, 조회수가 신경 쓰이지 않던가?
평가받지 않을 글을 쓴다 해도 문제다. 사회적으로 부과된 완벽주의에 절여진 나머지, 나만 볼 글임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자가 검열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도 안 보는 곳에 혼자 일기를 쓰더라도 우리는 첫 줄부터 막힌다. 쓰다가 고치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쓴다. 잘 쓸 이유가 하나도 없음에도 잘 쓰려는 행위를 멈추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글쓰기의 부담을 줄일 수 있을까? '잘'을 버리면 된다. '글을 잘 쓰자'에서 '글을 쓰자'로 목표를 바꾸면 된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평가받는 글쓰기에만 익숙해져 왔다. 그래서 아마 처음에는 안 될 것이다. '지금부터 평가받지 않을 글을 써야지' 해도 아마 잘 되지 않을 것이다. 평생 평가받는 글에만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모종의 훈련을 거치지 않는다면 '평가받지 않을 글'을 쓰기는 어렵다.
그러니 지속적으로 평가받지 않을 글을 쓰는 연습을 하자. 글을 잘 쓰지 말고, 일단 쓰는 연습을 하자. 아무 생각 없이 썼는데도 맞춤법이 다 맞다면, 문장들이 다 읽을 수 있게 쓰여 있다면 여러분은 '잘'의 부담을 내려놓는 데 실패한 것이다. 아무도 못 알아볼 정도로 휘갈기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에서 지시하는 내용을 '받아 쓴다'는 마인드로 글을 쓰도록 연습해야 한다.
나는 글의 생산자가 아니다. 편집자다.
여러분의 머리가 시키는 대로 줄줄이 받아 적는 연습을 하자. 여러분은 생산자가 아니라 편집자다. 일단 머리가 시키는 대로 글을 줄줄이 토해낸 다음, 그 안에서 쓸 만한 문장을 골라내는 과정을 거쳐 글을 작성해 보자. 사실 지금 쓰는 이 글도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놀랍게도 평소 글을 쓰는 데 들이는 수고의 절반 정도 만으로도 이 글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정말 눈 뜨고 못 봐줄 만한 글이었지만 토해내고, 편집하고 나니 그래도 읽을 만한 글이 되지 않았는가?
홈페이지를 열었습니다!
허용회 작가의 사이콜로피아 홈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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