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잠시만 눈을 감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자. 답을 생각해 내는 데 얼마나 걸렸는가? 필자가 예상하기에 아마 별로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을 것 같다. 만약 여러분의 친한 친구가 위와 같이 직접적으로 물어봤더라도 금방 답을 냈을 것이다. 질문을 듣자마자 아마 수초 이내에 운을 뗐을 것이고, 금방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말하기가 아니라, 글쓰기를 위한 질문이었다면 어땠을까? 말하는 것만큼 수월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1) 첫 한 마디를 시작하기까지의 시간이 길어진다. 말할 때는 안 그랬겠지만, 글로 쓰자니 어떤 내용으로 첫마디를 떼야할지 고민이 들기 시작할 것이다. 어떻게 서두를 떼야 독자(청자)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 생각이 많아진다. 첫인상이 별로면 독자는 다 읽어보지도 않고 떠나버릴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첫 한 마디 때문에 저 쉬운 주제에 답을 하지 못하고 글쓰기를 그만둬 버리곤 한다.
2) 우리는 '말하기'와 달리, '글쓰기'라고 하면 본능적으로 분량부터 걱정한다. 브런치 스토리에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주제로 글을 쓴다고 하자.
엊그제 술집에서 친구와 한 잔 했고, 어제는 드러누워 잠만 잤으며, 오늘은 냉장고에 있던 반찬 꺼내서 대충 밥을 먹고 뒹굴거리며 유튜브를 시청하다가 이제 일어나서 뭐라도 하려던 참이다.
친구에게 근황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면 위의 내용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브런치 스토리에 써서 올릴 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쓸 공간은 잔뜩 남아 있는데, 꼴랑 저 1~2줄만 쓰고 말아 버릴 것인가? 하다못해 줄 바꿈이라도 많이 하고, 이미지도 넣고, 폰트도 신경 쓰며 마치 시/에세이처럼 멋들어지게 보이도록 편집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아니면 최근 있었던 일들을 더 많이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하든가.
3) 우리는 '말하기'와 달리, '글쓰기'에서 유독 '배열의 문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먼저 누군가에게 말할 때는 안 그러면서, 글을 쓸 때는 꼭 개요outline라는 것을 생각한다. 서두는 어때야 하고, 본론에는 뭘 넣어야 하고, 결론은 어떻게 해야 할지 신경을 쓴다. 더 파고들면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지 일일이 살피려 한다. 글을 쓴 다음, 흐름에 방해가 되는 부분이 있으면 몇 번이고 배열을 고치거나 수정/삭제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친한 친구에게 '말하기'를 할 때는, 배열의 문제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먼저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 중요한 것은 배열보다는 신속함이다. 상대가 '요즘 어떻게 지내?' 물었는데 5초, 6초,..., 10초,... 어떻게 서두를 꺼내야 할까, 어떤 흥미로운 도입부를 건네야 할까 하면서 고민만 할 수 있겠는가?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무엇이든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대화를 시작하고자 할 것이다. '뭐지,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 '내 말을 듣긴 한 거야?' 침묵으로 일관하면 상대방은 불쾌한 기분을 느끼기 쉬울 테니 말이다.
상대를 배려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일단 말을 꺼내게 되지만, 우리가 말을 할 때 배열의 문제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사실 '지금 이 시점에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말하기 과정에서는 발화의 자기 교정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엊그제 저녁에 내가 A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번화가에 나갔는데 말이야,
아, 그전에 낮에 있었던 일을 먼저 이야기해야겠네,
(주절주절), (블라블라)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이런 일도 있었는데...
아참, 지난주에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들어볼래?
말하기에서는 자기 교정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아무 때나 과거와 현재가 뒤바뀌고 발화자의 흥미와 초점에 맞춰 대화의 주제도 자유롭게 변주되는 모습을 보인다. '배열의 문제'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다. 재미있는 것은, 청자 입장에서도 '배열의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제저녁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내일 일정 이야기를 꺼내도, 오늘 있었던 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엊그제 있었던 일로 넘어가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인다. 만약 도저히 흐름을 따라갈 수 없다면 추가로 질문하면 될 일이다. 발화자가 펼쳐 놓은 여러 주제들 가운데 더 궁금한 것이 있다면 콕 집어서 물어보면 된다. '아까 했던 ~ 얘기 좀 더 자세히 좀 해볼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지금까지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말하기와 글쓰기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심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살펴봤다. 두 맥락의 차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말하기 - 첫 단어가 빠르게 나타남, 중간에 자기 교정이 활발하게 일어남, 배열의 문제를 신경 쓰지 않음
글쓰기 - 첫 단어를 신중하게 고름, 분량의 압박을 느낌, 배열의 문제에 크게 집착함
위의 내용을 곱씹어본다면, 우리가 왜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주절주절 글을 쓰지 못하는지, 왜 글을 쓸 때면 첫 문장부터 번번이 막히고 좌절하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하듯,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배열의 문제를 신경 쓰지 않고, 마치 친구에게 대화를 시도하듯 자연스럽게 주절주절 토해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글쓰기의 핵심이다. 배열의 문제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면 앞의 다른 문제들도 보다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다. 배열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1) 보다 많은 말을 할 수 있기에 분량이 늘어난다. 2) 그 안에서 첫 단어, 첫 문장으로 쓸 수 있는 흥미로운 표현을 더 쉽게 발굴해 낼 수 있다.
물론 배열을 무시하다가 글이 너무 산으로 가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이 따라올 수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마지막에 '세 줄 요약', 혹은 '결론'을 확실하게 정리하라. 글의 무게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는 필요하다. 다만 그 무게중심이 글의 곳곳에 분산될 필요는 없다. 자유롭게 전개하고, 상상하고, 배열하되, 독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마지막에 확실한 요약/결론을 제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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