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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웠다고요? 자존심을 꺾어야 자존감을 들일 수 있어요

감정의 해결은 문제 해결이 아닙니다

연애할 땐 덜했는데, 결혼하고 나니 아내와 다투는 일이 은근히 많아졌다. 정말 별거 아닌 일들(섬유유연제 한 컵 넣기 대 반컵 넣기, 애기 옷을 개는 방법, 기타 내가 시답잖은 장난을 치면 아내가 이따금씩 화를 내는데, 그럴 때 나는 '왜 그런 걸로 삐지지', 아내는 '장난도 분위기 봐가며 해야지')이라서, 나중에 지나고 보면 도대체 왜 싸웠지? 하고 어이없어할 때가 많다.



자존심이 우세할 때 vs. 자존감이 우세할 때


때때로 나는 자존심 때문에 다툰다. 내가 자존심을 앞세우고 있다는 것은 아마 제삼자가 보면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감정적이다. 뭔가 보면 되게 억울해 보이고 짜증 나 보인다. 그리고 조잡한 논리 몇 가닥을 내세워 밑도 끝도 없이 '우겨댄다'. 사실 본인 말이 틀렸으면서(그걸 본인조차 속으로는 알면서), 그냥 지기 싫으니까 몽니를 부린다. 이럴 때 아내는 '대화를 그만하자'라고 한다. '어디 더 건드렸단 봐라' 하는 느낌을 풀풀 풍기며 경계하는 것도 같고, 무엇보다 말이 안 통하니까 감정부터 삭히라는 의도다.


그런데 자존심 말고 자존감이 우세할 때도 있다. 자존심 세울 때와 똑같이, 정말 별거 아닌 걸로 다투는 순간이지만 이 때는 금방 '미안하다', '앞으로 잘할게'와 같은 말이 나온다. 이때 나는 '승패' 따위는 정말 상관없다는 듯한 기분을 받는다. 아니, 애초에 이기고 지는 게 어디 있겠는가. 잘못한 사람이 명확히 있고, 사과받아야 할 사람이 명확히 있는 것을. 그냥 사과하고, 사과받으면 된다. 사과한다고 해서 내 자존감이 깎이는 건 아니다. 사소한 다툼 따위는 자아 위협ego threat이 되지 못한다.



자존심/자존감은 '사과'와 연관되어 있다


그간 인생을 돌이켜보면 그랬다. 내가 잘못했거나, 최소 내 착각이나 실수로 벌어진 일이었음에도 나는 어떨 때는 사과를 했고, 어떨 때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내가 겪어 왔던 상대방들도 그랬다. 지가 잘못해 놓고 어떨 때는 사과를 했고, 어떨 때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자존심을 앞세우는 경우에는 사과가 없었고,
자존감을 앞세우는 경우에는 (늦게라도) 사과가 있었다.


사과 잘 안 하는 사람은 자존심이 우세한 사람이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본인이 잘못했다는 걸 속으로라도 알면 다행이지만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사람은 높아진 자존심에 양심을 그만 잡아먹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면 내가 겪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화를 냈다가도 잠잠해졌고, 어떤 방식으로든 사과의 메시지를 전해 왔다. 인상 깊은 점은, 사과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굴욕적(?)인 모습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후련해했고,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 기쁘다는 듯한 인상이었다. 사과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결코 상대방이 하찮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마음이 단단한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으면 했지.



사과를 잘 못하겠다고요? 


주변 사람들이 자꾸 내게 이런저런 형태의 불만을 표시할 때, 하지만 나는 그들이 왜 불만을 갖는지 모르겠을 때, 그때야말로 자존심을 경계해야 하는 순간이 아닐까. 


유독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어렵다면, 그건 자존감이 아니라 '쫀'심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어느 정도 이해하는 부분도 있다. 사실 한창 다투는 와중에는 자존감이 아무리 높아도 바로 꼬리 내리고 사과하는 게 어렵다. 사람이 감정적으로 변하면, 원래 그렇다. 감정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이 괜히 '화났을 때는 대화를 잠시 멈추고 서로 떨어지라'라고 조언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감정의 해결 =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다툴 때는 불같이 싸우다가도, 잠시 서로 시간을 가지며 기분을 가라앉힌 뒤, 나중에는 우리가(내가) 언제 싸웠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고 관계를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감정은 해소되었을지언정, 다툼 과정에서 표출된 자존감/자존심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해, 사과의 과정이 없다면 그날의 다툼은 '정신승리'(합리화rationalization)로 기억에 갈무리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나는 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꺾였어야 할 자존심은 그 기회를 잃은 채 계속 마음에 남게 된다. 반면 역설적으로 먼저 사과하면서 확실하게 낮은 자세로 가야, 비로소 자존심을 꺾어버리고 그 자리에 자존감을 키울 수 있게 된다.



지는 게 이기는 거라니까요



안다. 사과하며 '저자세'로 나가면 '호구'되는 거 같아서 불안하다고? 상대방이 나를 얕잡아볼 것 같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이 더 잘한 거 같아서 분하다고?


나는 100% 모든 책임을 본인에게 돌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과해야 할 것은 여러분이 상대에게 했던 모든 말과 행동이 아니다. 그중에 자신이 확실하게 잘못했다, 너무 나갔다, 판단되는 것들만 사과하라는 것이다. 솔직히 그 어떤 다툼이든 100% 일방과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1:99라 할지라도, 다툼이라는 건 반드시 쌍방과실이다. 


여러분이 1%의 잘못을 범했다면, 1%에 대해서만 사과하면 된다. 99% 잘못한 주제에 상대방이 사과를 받고도 뻔뻔하게 나온다? 아마 여러분이 더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여 '이겼다'라고 한들, 상대방의 자존심은 꺾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더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차라리 사과한 뒤에, 상대에게 '화가 났던 이유', '그렇게 행동한 이유', '그때의 마음이 어땠는지' 차분히 질문하며 대화를 풀어가는 게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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