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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거면 왜 결혼했냐고? 일탈의 역설

그럴거면 뭐하러 결혼을 하나요?

가끔 인터넷을 보면 와이프가 친정 가는 이벤트에 남편들이 너무 좋아해 하는 사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와이프가 애들 데리고 며칠 친정 간다고 합니다! 뭐하며 놀까요?' 이런 글이라도 올라온다 치면 덩달아 흥분한 유부남들의 각종 아이디어가 댓글로 주루룩 올라오죠.


집에 맥주부터 쟁여두시죠

밤새 넷플릭스 보셔도 되겠네요ㅜㅜ

OOO 게임 혹시 해보셨나요?

날도 좋은데 드라이브 다녀오시죠!

친구들 연락부터 돌려야지 뭐하시나요


한편, 이 상황이 너무 부러운 어느 유부남들의 진심어린(?) 반응도 있습니다.


얼마나 외로우실까요ㅜㅜ 와이프더러 빨리 오라고 전화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지금이라도 처갓집가시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밀린 빨래와 설거지, 청소하고 각잡고 대기하고 있으셔야죠!


그런데 이런 유부남들의 호들갑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부류도 있습니다. 다름 아닌 미혼 남성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결혼을 내키지 않아하는 미혼 남성들은 유부남들의 반응이 더욱 이해가 안 갑니다. 자기가 선택한 결혼이면서도 혼자 있는 게 그렇게 좋다니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랍니까.

 

그럴거면 굳이 결혼은 왜하나요

혼자살면 맨날 하고싶은거 할 수 있는데

이래서 저는 결혼 안하려고요

하고싶은거 맘대로 못하는 결혼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결혼 후회하시는거죠?




시험 기간에 미친 척하고 놀아제낀적 없으신가요?
집에 반찬 다 놔두고 갑자기 배달 음식 시켜먹은 적 없으신가요?
혹은 부모님한테 문제집 살 돈 받았다가
그만 갖고 싶던 것 사버리고 혼난 적 없으신가요?



우리는 누구나 일탈을 꿈꿉니다. 반복되는,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상에 작은 여흥이 될 수 있는 이벤트를 기대하고 때로 과감히 실행에 옮깁니다. 살다보면 그런 날, 그런 기분이 찾아오곤 합니다. 오늘따라 밤새 취하고 싶다, 늘어지게 잠만자고 싶다, 평소 안가본 곳에 가보고싶다, 과감하게 이성에게 번호 물어보고 싶다, 뭐 이런 것들이요.


그런데 짜릿한 일탈이 성립하기 위한 중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일탈을 제어하는 감시자의 존재입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받지 않고 맘껏 하고싶은 걸 한다? 처음에는 재미있겠죠. 하지만 그 어떤 쾌락에도 역치는 존재하는 법입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그렇게 좋았던 어떤 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시들해지기 마련입니다.


일탈이란, 역치를 넘어서지 않는 한도에서 쾌감을 올리는 행위입니다. 역치를 잡아줄 수 있는 감시자가 있기에 우리는 제한된 시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쾌감을 추구합니다. 역설적으로 감시자의 존재 덕에 일탈 행위는 더욱 더 큰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그림자가 없다면 빛도 없다,

빛이 없다면 그림자도 없다


토요일과 일요일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월요일~금요일의 존재 때문입니다. 라면이 맛있는 이유는 매일 먹는 밥 때문입니다. 게임이 즐거운 이유는 매일 하는 공부/업무 때문입니다. 쇼핑이 즐거운 이유는 아슬아슬한 통장 잔고 때문입니다.


쾌감과 제약은 함께 가야 합니다. 제약 없는 쾌감은 금세 질리기 마련입니다. 쾌감 없는 제약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제가 결혼을 한 이유, 자발적으로 육아 지옥을 택한 이유, 평소 와이프의 잔소리를 견디며 심신수양하는 이유, 그건 모두 와이프 친정 보내고 홀로 소파에 앉아 살얼음 낀 맥주를 까며 엄청 큰 볼륨으로 플스 게임을 즐기기 위한 착실한 빌드업이었다고 말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부부 금슬이 나쁘다거나 결혼을 후회한다? 전혀 그렇진 않다는 점입니다. 저희는 서로를 사랑합니다. 집에서 웃음꽃이 피며 평소에도 맛집 잘 다니고, 가끔 삼겹살 굽고 하이볼 건배하며 즐길 건 다 즐깁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나들이, 외출 모두 즐겁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행복도 일탈이 주는 기쁨을 대체할 순 없습니다. 일탈은 일탈만의 고유한 재미가 있습니다. 해도 될까? 가능할까? 사도 될까?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외치는 순간 머릿속을 타고 흐르는 그 짜릿한 전기가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다 가지지 못한 자'만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돈이 워낙 많아서, 쥐고 있는 권력이 대단해서, 주변에 뭐라할 사람 아무도 없어서 마음대로 뭐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감히 말하건대 '일탈'의 재미를 느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돈이 쪼들려 봐야, 눈 새파랗게 뜨고 감시하는 보호자/배우자/주변 지인이 있어 봐야 느낄 수 있는 쫄깃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건, '다 가지지 못한' 제가 나름 내세울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강점 중 하나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끔 누군가는 일탈을 경계하곤 합니다. 일탈이 반복되다 습관되면 어쩌냐구요. 일리 있는 말입니다만 웬만해서는, 어지간한 남편이라면 일탈 했다가 곧 제자리로 돌아올 겁니다. 거듭 말하지만 제약 없는 쾌감은 금방 질리기 마련이거든요(만약 약물이나 도박이라면 그건 예외입니다 확실히 개입하세요). 저도 확실히 체험했지만 와이프가 산후조리하러 몇 달 친정갔을 때, 그 모든 맥주와 넷플릭스와 플스가 재미없었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딱 일주일만 넘어가도 일탈의 재미가 없어지더라고요.



결론: 서로에게 일탈을 선물하자


자랑이지만 제 와이프는 야무진 사람입니다.  하나 허투루 처리하는 법이 없죠. 소비도 매우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모습이 염려스럽습니다. 왜냐고요? 일탈이 없기 때문입니다.


에이~ 얼마 안하는구만 그냥 사버려

오다 주웠어(?). 이거 갖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애기 볼테니까 어디 드라이브라도 다녀는 게 어때?


전 일부러 와이프에게 일탈을 선물합니다. 처갓집 가는 와이프를 생각한 나름의 보은입니다. 그 전에 서로가 감시자인 부부 사이에서 상대방에게 해줄 수 있는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와이프의 존재가 있기에 '일탈'이라는 것을 경험해볼 수 있습니다. 와이프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물론 저보다 서열이 높으신 내무부 장관님이시기에 상대적으로 눈치는 제가 더 많이 봅니다만, 어쨌든 와이프도 뭐 사고 싶을 때, 갖고 싶을 때, 다녀오고 싶을 때 제 눈치를 봅니다. 제가 없는 순간을 틈타 이것저것 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 그저 귀엽습니다. 그런 귀여운 일탈 정도는 얼마든지 눈감아줄 수 있죠.


와이프가 친정을 가기로 했다고요? 축하합니다. 이제 일탈의 기쁨을 맛보시겠군요. 하지만 상부상조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와이프가 친정에 다녀왔다면, 유부남인 여러분도 그녀에게 적절한 때에 일탈을 선물하셔야 합니다. 그게 인지상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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