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하기
술마시기
자전거타기
제 취미활동은 저 위의 것이 전부입니다. 예전에는 독서도 있었고, 트래킹도 하고 뭐 이것저것 시도해보긴 했습니다만 결국 습관이 되지 못하고 묻혀버렸죠. 하지만 위의 취미들도 요즘은 거의 즐기지 못합니다. 집에 9개월 짜리 딸이 있어서 애기 봐야 하거든요. 아침에 일어나면 오전에 애 봐주고, 출근해서 일하다가 퇴근 후 애기 밥 먹이고 씻기고 재우면 체력이 고갈됩니다. 유튜브 영상이나 깨작 보다 금세 잠들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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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제 와이프의 취미활동입니다. 분명 뭔가 더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다 적지는 못했습니다. 와이프는 현재 전업주부입니다. 일 나가는 저보다 애 보는 시간이 더 많죠. 그런데 놀랍게도, 저보다 더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기고 있습니다. 제가 출퇴근 하기 전후, 그리고 주말 시간을 야무지게 활용하여 수많은 취미활동을 즐기고 있습니다.
와이프는 저보다 어립니다. 취미활동을 즐기기에 체력적으로 우수(?)하죠. 하지만 그것 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정신의 빈곤이랄까요? 전 맨날 하던 것만 하고, 보던 것만 하고, 먹던 것만 먹는 사람이라 세상을 인식하는 폭이 좁다고 느끼곤 합니다. 일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면 놀랄 정도로 기호도 단순하고 평소 하고 싶은 것도 잘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하지만 와이프는 다릅니다. 도대체 어디서 알고 온 것인지 이거 재밌다더라, 여기 맛있다더라, 이거 배우면 좋다더라 하면서 여러가지 할 만한 거리들을 잘 찾아 옵니다. 전 그나마 와이프 덕에 문화생활을 하며 삽니다. 아마 와이프 없었으면 총각 때와 마찬가지로 맨날 집에 처박혀서 게임이나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가끔 영화도 보고, 난생 처음 연예인 콘서트도 가보고, 맛집도 돌아다니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와이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보, 나 다음 주에 친정 다녀올까 하는데 괜찮지?
어이쿠, 와이프가 친정을 간다고 하네요. 저는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다음 주에 일정 바쁜데 괜찮겠어?', '나 여보 가고 나면 외로워서 힘든데, 금방 돌아올거지?', '우리 애기 보고 싶어서 어떻게 해ㅠㅠ' 이런 멘트를 치지만 사실 머리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와, 친정 보내면 나 뭐하지?
묵혀둔 게임이나 실컷 할까?
아니, 일단 마트 가서 맥주부터 장 봐와야 해
오랜만에 혼자 드라이브나 다녀올까?
다음 주에 친구들 시간 되나 모르겠네
시간이 어느덧 흘러 와이프가 친정을 가고, 저는 머리 속에 계획했던 일들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늘 하던대로' 착실히 맥주를 구입하고, 집에 와서 게임기를 켭니다. 한동안 게임을 즐기다 배고픔을 느끼고는 치킨을 시킵니다. 살짝 얼려 둔 캔 맥주와 함께 치킨을 뜯으며 넷플릭스를 뒤적입니다.
너네 와이프 저번에 친정갔다면서? 뭐하고 놀았냐?
유부남 친구를 만나면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유부남들끼리는 '대리만족'이라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내 와이프가 친정을 안 갔어도, 다른 친구 와이프가 친정간다 하면 이상하게 덩달아 신이 납니다. '와이프 친정 간 사이 뭐 하고 놀았냐고' 썰 풀어보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면 친구는 신이 나서 말합니다.
집 정리 한 번도 안 했어
집에서 신나게 치킨 뜯었지
비싼 위스키 따서 먹었어
맥주 마시며 야구 보고 놀았지
친구들 불러다 진탕 마셨어(어? 그러고보니 너도 왔었잖아)
제가 인맥 풀(?)이 좁은 것일까요? 어째 유부남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혼자 했다는 내용들이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주변 지인들도 그렇고, 회사의 유부남들 이야기 들어봐도 비슷합니다. 술 먹고, 늘어지게 자고, 게임 하고, 집 안 치우고, 안 씻고, 뒹굴거리고 뭐 거의 그런 류의 이야기들입니다.
와이프들은 친정에 가기 전, 남편들에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나 없다고 막 이상한 일(?) 벌이지마', '혼자여도 청소 좀 하고 씻고 살아', '집 어지러우니까 친구 부르지 마', '술 적당히 마셔', '...'. 친정 간 이후에도 중간 중간 카톡이나 전화를 넣으며 안부(?)를 묻곤 하죠. '오빠 집에 잘 있어?', '괜히 여기저기 막 돌아다니지 마, 나이 생각도 해야지', '설거지는 잘 하고 있지?', '맨날 사먹지 말고 집밥도 좀 먹고'.
하지만 와이프들의 걱정과는 달리, 생각보다 유부남들은 단순합니다. 기껏 혼자가 되었어도 별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혼자가 된 와이프들은 간만에 문화생활도 하고, 친구들과 여기저기 놀러도 다니고, 하여튼 재밌는 거 다양하게 즐기다 오겠지만 혼자가 된 남편들은 뭐 딱히 하는 게 없습니다. 기껏해야 술 사다 마시며 배나 긁으며 티비 보고, 안 치우는 것 정도...?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아, 우리 남편은 안 그렇다고요? 뭐 그래봐야 조기축구, 낚시, 등산, 자동차 동호회 이런 거겠죠;;;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막상 와이프 친정 보내놔도 그리 재미있는 건 아니라고 말입니다. 첫 날에는 재미있어요. 사소한 일탈을 부리며 혼자 된 기분을 만끽합니다. 그러나 사다먹는 것도 하루이틀입니다. 티비도 자꾸 보면 지겹습니다. 맨날 와이프 친정 이벤트를 기다리면서도, 막상 혼자가 되고 나서 하는 일이 거기서 거기라 의외로 재미를 크게 느끼지 못합니다. '지금쯤 와이프는 친정에서 잘 있을까? 우리 애기는 뭐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하며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솔직히 어떨 때는 와이프 친정 가기 전이 더 재밌습니다. 와이프의 친정 이벤트가 확정된 순간부터, 와이프가 집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의 기간이 더 설레고 행복합니다. 디데이를 기다리며 '뭐하고 놀지?', '이렇게 놀면 재밌겠지?' 미리 상상하며 계획을 세우는 순간이 더 두근두근하고 즐겁습니다.
유부남들, 솔직히 와이프더러 친정에 오래 갔다 오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짧게 다녀오더라도 자주 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와이프 친정 가는 날을 기다리며 설레는 행복의 총량이, 혼자 있을 때 느끼는 행복의 총량보다 더 많을 테니까요.
'일 년에 한 번, 한 달 동안 친정 보내기'
vs.
'매달 한 번, 이틀씩 친정 보내기'
하면 솔직히 저는 후자를 택할 겁니다.
그러니 유부남 여러분, 작전을 슬기롭게 세우시기 바랍니다.
오래 다녀 오라고 재촉하지 마시고 짧게 자주 다녀오게 유도하시는 게 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