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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Mar 24. 2020

잃어버린 10년의 교훈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

한국의 정치적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은 상대측의 집권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표현하기를 즐겨한다. 현 정권도 그들이 잃어버렸던 10년간 많은 준비를 해서 집권에 성공했다는 대중매체의 보도가 있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은 초등학생이었던 어린아이가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될 만큼 긴 시간이다. 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도시화로 인해 1~2년이면 강산이 변하기도 한다. 그만큼 10년이란 기간은 결코 짧지 않다.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이루어 나가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이전의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그 이전의 김대중 노무현 정부로 인해 "잃어버린 10년"을 통해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이루었는가? 또 적폐 청산을 강조하는 현 문재인 정권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로 인해 그들이 "잃어버린 10년" 동안 무슨 교훈을 얻었고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COVID-19로 나라 안팎이 온통 난리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준비해서 정권을 장악한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외교, 안보, 정치, 경제, 교육, 보건 복지 등, 어떤 분야도 내 마음을 편하게 안정시켜 주는 것이 없다.  왜 그럴까? 정치지도자의 문제인가? 아니면 한국 정치구조의 문제인가?




7년 전 어느 봄날, 정치전문대학원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 발제했던 권태준 교수의 책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를 다시 정리하면서 자문자답해 보려고 한다.

이 책의 기본 논지는 오늘 주역 세대의 자신감과 과감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국들 중 가장 성공적이고 역동적인 "국가 만들기"와 그에 따른 정치, 경제, 사회적 발전의 터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터전은 어느 한두 사람의 정치적 지도력 또는 어떤 정파, 계급, 계층의 덕도 탓도 아니고, 대내외적으로 어두웠던 우리나라의 여건이 개인적 사회적 위기의식, 긴장감, 생존능력을 강화하고, 그 극복 의지를 끈질기게 한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즉, 전화위복 논리의 한국적 현실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프롤로그: 세계 시간대의 한국사회)

한 나라의 정치 경제 체제가 자유민주주의적이려면 시민사회 구성원들이 무엇보다 먼저 자율적 생존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해방과 독립 직후 정치 사회적 혼란과 민생대책의 절박성,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 복구 등을 위해서는, 국가의 다른 어떤 기제보다 집행 권력의 역할이 큰 만큼 관료제적 효율성이 절실했지만 그 필요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가 독립 이후 상당기간 동안 집행권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의 "개인적 통치" 여건이 되었다.(제1장 국가가 중심인 시대)



박정희 정권은 거시적 투자배분으로부터 미시적 정치 경제행위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관리와 제어를 한 "개발독재"체제였다. 이러한 "개발독재"식 "선행조건 정치"의 성공 여부가 주도 정치세력과 정권의 능력으로만 담보되는 것은 아니고, 그 나라가 처한 정치 지리학적 환경과 그에 따른 국가안보 상황이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경우, 국제적 냉전 관계의 최전방에 있어 국가안보에 대한 위기와 생존 불안 의식이 절실했던 상황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드물게 부국강병식 "선행조건 정치"가 산업화와 경제개발의 실적을 내는 데 한층 더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그 주도 정치세력이 실적에 의해 상당한 기간 동안 국민적 지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제2장 정치적 기업가로서 정부)

한국의 지난 세월 산업화와 경제개발 체제와 그 전략 논리는 자본주의적이기보다는 "의제(擬制) 자본주의"적이었다. 즉 서 유럽제국의 자본주의 전사(前史)와 일맥상통하는 신중상주의적 축적 과정이었으면서 20세기 후반의 지배적인 세계시장 논리에 "타협"한 체제였다.(제3장 개발독재는 자본주의적이었던가?)



20세기 후반 "세계의 시간대"에서도 한국에서 "개발독재" 체제가 상당기간 대중적 저항을 받지 않은 까닭은, 일제 식민지배로 널리 일깨워진 민족-국가의식 덕이다. 우리의 민족의식은 "경제적 민족주의"로 타협되어 국가적 자립경제에 의한 동포적 "함께 잘 살기" 기대로 결집되었다. 또 우리의 정치적 민족 공동체 의식은 국가의 주권적 자주성을 잃어 타민족과 그들의 국가를 일상에서 널리 체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제4장 민족과 국가의 만남)

국가권력이 앞장서서 부족한 자원과 자본을 동원하여 산업화와 경제개발을 추진하려면 불균형한 집중과 집적(集積)이 불가피하다. 정치권력이 이 불균형적인 국토공간 구조를 만들어 내는 데 앞장서면, 언제 어디서나 큰 정치적 모험을 감당해야 한다. 한국의 "개발독재" 정권은 "유신(維新)"이란 명분으로 이 모험의 소지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거대한 전환"의 시대를 맞아 모두 "상향이동"을 기대하던 터에, 전 국토 산업공간구조의 불균형적 재편 과정에 따른 지역 간 "상대적 박탈감"은 정치적 지형의 변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의 정치, 경제, 사회적 이동에 정치적 연줄과 연고가 큰 힘으로 작용하고, 그 가운데 특히 출신 지역 연줄이 많은 이들의 눈에 띌 정도가 되었다. 그 결과, 영남과 호남 같은 비교적 넓은 지역이 "정치 자원화"됨으로써 민족공동체적 "함께 잘 살기" 기대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민족의 자유주의적 개인화, 계급적 분화를 거칠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이에 현대적 산업구조가 확대 심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치적 인위적 불평등 구조에 대한 반발이 이런 모습으로 구체화되었다.(제5장 함께 잘 살기 믿음의 해체 과정)


한국의 "민주"정치는 "이익 패러다임"보다는 도덕적 온정적 "열정"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타협보다 정파 간 도덕적 규탄과 이념적 비판에 열중하고 있음으로 지극히 비실용적인 것이 문제다. 즉 우리나라식의 정치는 대결적이기만 하고 생산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민주정치가 실용적 타협의 정치가 되려면 우선 "시민사회(civil society)"가 물질적 정신적으로 자율적이고 동시에 다원적으로 분화되어 있어, 그에 기반한 정당과 정파들이 "제도권" 정치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 정당과 정파들 간에 집권이 절차적으로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에 의해 가능해야 한다. 이 절차적 조건은 우리나라 정치에도 이제 "유일한 경기의 규칙"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시민사회의 다원적 자율성은 서양의 경우에 비하면 상당히 소극적이고 제한적이다.

한국 시민사회와 정치와의 관계가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시민사회 자율성 기반 형성이 일천하고 온정적이며 개인적 연줄 중심의 사회관계 전통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오늘의 "민주화" 정치가 바로 지난 한 세대 동안의 지역공동체적 갈등정치 또는 "운동권 민주화"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개인적 자유는 넘쳐나는 듯하다. 특히 언론, 출판, 집회, 결사 같은 정치적 행위와 관련된 개인적 자유는 "국가보안법"에 명백히 위반되고 동시에 그 일이 정권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한정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무엇보다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는 오늘 이 땅에 사는 시민들에게는 이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고, 그 점에서는 서양 어느 자유민주주의 국가 시민들에게도 뒤질 게 없다. 그러나 공리적 개인주의적 자유에 대해서는 이 나라에서는 여전히 온정적 인간관계 가치가 상당한 제어를 하고 있다. 즉, 사회 구성원 각자 평등하게 자유로운 "자연인"으로서 자기 이익에 급급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믿음에는 상당히 유보적인 듯하고, 그보다는 "함께 살기"에 더 기울어져 있다는 말이다. 지식인들, 특히 "민주화"에 앞장선 이들이 더욱 민주화의 이른바 "이중 전환," 즉 정치적 자유와 실질적 사회적 평등의 동시 전개를 고대하는 경향도 이나라 대중-"민중"-의 그런 정서를 대변한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치 경제 사회적 "맥락적 문제"를 푸는 데는 전문가도, 지도자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이야말로 시민이 주체가 되어야 할 일이다. 앞으로 전개될 한국 민주주의의 주체는 오늘의 10대~30대인 다음 세대이고, 이들의 정치적 주체의식은 바야흐로 형성되고 있는 자아의식과 사회관계 질서 그리고 이들의 생계에 영향을 미치게 될 대내외적 환경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제6장 한국적 민주화)

한국에서도 "지식인"이기 때문에 대중보다 앞서 "세계 시간대"에 동참하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대중이 고담준론(高談峻論)에 안주해 있는 지식인들보다 더 민감하게 "세계 시간대"에 적응해 있다. 이런 시대에 "진보"니 "보수"니 하는 입장과 견해를 고수하려는 일관성과 고집은, 학문적이든 실천적이든, "세계 시간대"를 역행하는 일일 뿐이다. 이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는 모든 문제의 시비(是非)를 판가름할 수 있는 "거대 담론"도, 모든 문제를 한 가지 잣대로 분석해서 해결할 수 있는 보편적 해법도 없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대중은 당대를 혁명적 시대로도, 진보적 시대로도, 보수적 시대로도 보지 않는다. 다만 어떤 이들은 오늘의 시대상황 변화가 너무 급격하고 벅차서 아주 불확실한 시대로, 또 다른 이들은 변화의 속도와 범위가 큰 만큼 기회가 넘치는 시대로 볼뿐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지식으로 세상에 기여하려면, 현장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눈으로 사람들이 하는 일과 하고자 하는 일을 함께 하는 것이 첩경이다. 즉, 협치(協治)의 생산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에필로그: 미래에 대한 억측)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책의 프롤로그로부터 국가가 중심인 시대, 정치적 기업가로서 정부, 개발독재는 자본주의적이었던가, 민족과 국가의 만남, 함께 잘 살기 믿음의 해체 과정, 한국적 민주화라는 각 장의 주제를 거쳐 에필로그에 이르렀다.

나 자신은 물론 그 어떤 정치인이나 학자라도 질문에 단편적으로 답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개인보다는 우리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문화에 아직까지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민의 과정을 통해서 학자로서 시민으로서 좀 더 학문적이고 실천적인 방향으로 진일보할 수 있을 것 같다.



출처: https://m.cafe.naver.com/ImageView.nhn?imageUrl=https%3A%2F%2Fmcafethumb-phinf.pstatic.net%2FMjA
조선 후기 당쟁 가운데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삼전도의 치욕에 대한 기억이 주요 논점이다. 두 주역인 송시열과 윤증은 원래 사제지간이었다가 훗날 정적이 됐다. 송시열이 회덕(대전)에 살았고 윤증이 이산(논산)에 살다 보니 이들 사이의 논쟁은 ‘회니시비’로 불렸다. 회니시비는 제도 개혁에 대한 찬반의 연장선상에서 탕평론과 반탕평론이 갈등하는 형태였다. 회니시비는 이 시기 진보와 보수의 갈등 양상을 적나라하게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김용흠 교수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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