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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Jan 07. 2021

이어령 [눈물 한 방울]

코로나에서 벗어날 길은 타인을 위해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이다

어느 월간지에 투고할 인문학 에세이 글감을 찾기 위해 웹서핑을 하다가 이어령 교수의 [눈물 한 방울]을 만났다.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집필에 몰두해 온 이 시대의 지성 이어령 선생과 서울대 명예교수 김병종 화가의 신년 특별 대담 형식으로 인터넷 [조선일보] (2021.1.2.)에 게재된 글이다. 이어령 선생의 글을 읽을 때면, 그의 글을 필사하는 것만으로도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만년필로 필사했던 이어령 교수의 [눈물 한 방울] 구어체 원문을 다시 문어체로 옮겨 보았다.


코로나-19 타인과의 '접촉' '접속'으로 바뀐
 온라인 만남은 '탄타로스의 갈증' 같다.

눈 앞에 물이 넘실 거리는 데 마시려고 하면 물이 물러나버린다는 그리스 신화가 있다. '탄타로스(Tantalos)의 형벌'이다. 바로 눈 앞에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있고,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리지만 손가락 하나 '접촉'할 수가 없다. '접촉'이 '접속'으로 바뀐 디지털 온라인상의 만남은 그야말로 탄타로스의 갈증과도 같은 것이다.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땀'은 가난에서 벗어나 번영을 이룬 산업화의 뜻이고, '피'는 억압에서 풀려난 민주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피와 땀이 하나가 되어야 하루 천리를 달린다는 한혈마(汗血馬)처럼 힘을 낼 수 있는데, 현실은 반대로 대립과 분열의 피 눈물로 바뀌고 있다. 거기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덮쳐 인간관계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있다면 자유와 평등을 하나 되게 했던 프랑스혁명 때의 그 프라테르니테(fraternity, 박애), 관용의 '눈물 한 방울'이 아닐까? 나와 다른 이도 함께 품고 살아가는 세상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있다면, 나와 다른 이도 함께 품고 살아가는,
관용의 '눈물 한 방울'이 아닐까?


"사내자식이 왜 울어?"라는 말을 듣고 자란 우리에게 눈물 타령은 여전히 창피하고 나약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적석천(水滴石穿),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 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속담도 있고, 회초리보다 무서운 것이 엄마의 눈물이라는 말도 있다. 한국 만이 아니다. 사랑의 눈물 한 방울이 마법에 걸린 왕자를 주술에서 풀려나게 한다는 서양 동화도 있다.


코로나 백신은 과학기술과 기업이 만들어 내겠지만 코로나로 상처 진 마음과 영혼을 정화할 심청(心淸)제, 혼청(魂淸)제라는 백신은 종교, 예술, 철학 같은 문화의 몫이다. 지금 대중문화 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트로트 붐을 보라. 최근 어느 외국 기자가 이렇게 말했다. "트로트가 K-Pop처럼 세계적 성공을 거둘 개연성은 낮지만, 세계에서 가장 고령화가 빠른 국가인 한국에선 오랜 기간 인기를 누릴 것으로 예상된다." 트로트를 통해 한과 서러움을 달래고 힘을 얻는 고정 팬들이 젊고 어린 트로트 가수들에게 친자식, 친손주 같은 무조건적 애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신을 마마라고 불렀던 시대에도 그것을 달빛과 춤과 노래로 물리친 처용이 있었다. 런던의 페스트 대재앙을 소설로 쓴 다니엘 데포는 그것을 쓰기 전에 '혼과 육체를 페스트로부터 지키는 이야기'라는 팸플렛을 낸 적이 있다. 그 제목이 암시하듯 방역은 육체만이 아니라 혼을 보전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의사 이름이 류(Rieu)인데, 여기서 R을 D로 바꾸면 프랑스어로 신을 뜻하는 듀(Dieu)가 된다. 몸보다 그 영혼을 구하는 신의 눈물을 대신한 것이 바로 그 주인공의 역할이었다.


김병종 화가의 '바보 예수'라는 그림은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세속적인 시각에서 보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 떼를 두고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구하려는 것은 바보만이 할 수 있는 셈법이다. 나자로의 죽음과 멸망해가는 예루살렘을 보고 흘렸던 예수의 눈물, 안회(顔回)의 죽음과 골짜기에 외롭게 피어있는 난초 한 그루를 보고 탄식한 공자의 눈물, 길거리에서 병들고 늙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흘린 석가모니의 눈물. 우리는, 아니 세계는 그러한 눈물이 말라버린 사막에서, 무인도에서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한(恨)을 기층문화로 살아온 것이 한국 문화였다. 먹을 것은 없어도 인정의 눈물만은 '눈물보'에 가득 차 있었다. 실학자인 연암도 슬플 때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칠정(七情)이 사무칠 때 생겨나는 것이 울음이고 눈물이라고 했다. 희(喜), 로(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의 '칠정'이 '칠색'으로 나타난 것이 눈물의 다양한 무지개색이었던 것이다. 피는 못 속이는지, 눈물을 안습(眼濕)이라 부르는 요즘 젊은 세대들도 "감동을 먹었다"라고 한다. 눈물 기근에 굶주린 속마음을 엿볼 수 있다. 방탄소년단이 세계를 휩쓴 노래 중에도 '피 땀 눈물'이 있다. 노랫말을 보면 '한오백년'의 민요나 왕년의 트로트에서 한 세기 진화한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눈물은 초라하고 빈약한 것이다. 병상에서 흘린 나의 사소한 눈물들을 노트장에 낙서해 둔 글이다. 수술을 받고 방안에 누워있을 때였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누운 채로 사용한 휴지를 조금 떨어진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제대로 들어갈 리 없지만 어쩌다 휴지통으로 멋지게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까짓 휴지가 쓰레기통에 들어간 것뿐인데, 마치 3점 슛을 날린 농구 선수처럼 "클린 슛!"을 외치며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그러다가 이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내 모습이 측은하고 불쌍해서. "오! 하나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우리가 하나님한테 큰 것을 바랐던 적이 있었나? 친구들과의 대화, 잘 써지는 볼펜 같은 것, 비 오는 날의 라면 한 봉지 맛 같은 사소한 것들의 행복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지금 짊어져야 할 재앙은 너무나 크고 너무나 무겁지 않나?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노여운 것인지 서러운 것인지 그때 떨어지는 차가운 눈물방울, 낙서하듯이 그 눈물방울의 흔적을 적는다.


병상에서 격리 생활을 하니 고통과 그 한을 품을 시간이 주어진다. 사람들은 흔히 한을 품으려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풀어버리려고 한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뿐 뒤에 남는 것이 없다. 하지만 한을 품어 숙성시킨 뒤 그걸 글로 써 내려가면 '안네의 일기' 같은 것이 탄생한다. 역사를 바꾸는 눈물 한 방울의 힘이 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눈물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이다.
'눈물은 희망의 씨앗'이다.


지금 여당에는 이성(理性)이 없고 야당에는 야성(野性)이 없다고들 하지만 정작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인성(人性)의 눈물이다. 코끼리나 낙타도 눈물을 흘린다고는 하지만 이 지상에서 실제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지능이나 체력이 인간보다 월등한 AI 슈퍼 로봇도 눈물만은 흘릴 줄 모른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건 슬퍼서도 괴로워서도 아니다. 우리가 짐승 또는 기계가 아니라 영혼을 지닌 인간임을 증명하고 선언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타인을 위한 눈물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눈물은 사랑의 씨앗'이라는 대중가요가 있지만 '눈물은 희망의 씨앗'이기도 한 것이다.


커버 사진 출처: [중앙일보] 2014.12.29  [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배우 김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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