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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Jan 12. 2021

70년 전 해병대 군인교회가 설립되다

1951.3.12. 진해여고 강당에서 해병대사령부 교회 창설예배를 드리다

2021년 3월 12일은 해병대에 군인교회가 설립된 지 만 70년 되는 날이다. 이를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해병대 군인교회 70년사]를 집필하고 있다. 관련 역사자료는 해군본부에서 발간한 자료를 참고했다. 1966년 [해군 군종사 제1집(1948-1965)]에서 최근 ['19년 군종]까지 10권의 공간사(公刊史),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쓴 [해군 해병대 선교 70년사]가 근거다. 퇴고 중인 초안 서두를 브런치에 옮겨 적었다.




해병대사령부에 해병대 최초 군인교회가 세워지다  II  1951.3.12.


6.25전쟁시 중공군 개입으로 해병대가 진해로 철수, 부대를 재편하면서 차후 작전을 준비할 때 해병대사령부에 교회 창설의 기운이 태동했다. 당시 해병대사령부 참모장 김대식 중령(추후 제3대 해병대사령관 역임)은 해병대에 구원의 소식이 전해지길 간절히 원했다. 해병대 창설 전 해군본부 인사국장으로 근무했던 그는 자신의 국방부 관사 33호를 예배 장소로 제공, 3군 군목 업무의 모체가 된 '용산군인교회'를 설립(1949.2.5.)케 한 인물이다. 그는 신앙으로 무장하면 투철한 군인정신을 갖게 된다고 생각해서 해병대사령부에 교회를 세우려고 했다. 당시 해군통제부교회 박창번 목사 초청 예배를 추진했다. 그 결과, 1951년 3월 12일, 임시 주둔한 진해여고 강당에서 '해병대사령부교회' 창설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신학교 졸업 후 정훈감실에 근무하던 김동선 군무원이 사회를 보고, 기도는 참모장 김대식 중령(장로), 설교는 박창번 목사(해군 통제부교회 담임, 군무원)가 담당하였으며, 60여 명의 교인이 참석했다. 이렇게 창설된 해병대사령부교회는 해병대사령부 군목실 보다 먼저 생겼다.      


6.25 전쟁  중공군 개입으로 진해로 철수하여 부대를 재편하던 시절, 해병대사령부 군목실이 조직되기 전에 해병대사령부 교회가 설립되다.


그 후 해병대 군목 업무의 기초작업을 위해 초빙된 장창덕 목사가 해병대사령부교회에 시무하게 되었다. 두 번째 주일예배는 1951년 4월 장창덕 목사의 사회와 설교, 김동선 문관(군무원)의 기도와 독창으로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드려졌다. 장창덕 목사는 4월 15일 해병대 창설기념일에 장충단 해군 묘지에서 전장병이 참석한 가운데 해병대 전몰장병을 위한 추도예배를 집례하였다. 이는 해병대 최초의 전몰장병 추도예배였다.     


장창덕 목사는 군종업무를 위해 일할 일꾼을 얻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해 2월 조선신학교 출신 신성국 소위와 반병섭 소위가 임관해서 7대대와 독립 5대대에서 정훈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신학교 출신인 정훈장교가 군종업무를 겸무하도록 건의하여 재가를 얻었다. 같은 해 4월 5일, 이 두 명의 정훈장교는 군종장교 전과 발령을 받았다. 한편 종군 목사를 모집, 전방 배치 계획을 수립하여 4명을 모집하고 해병대 제1기 특과 사관후보생으로 해병학교에서 훈련을 받게 했다. 이처럼 군종 업무의 기초를 닦은 장창덕 목사는 개인 사정으로 사령부를 떠날 때까지 정훈월보에 글을 기고하면서 문서 선교에 힘쓰는 등 군종업무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1951년 5월 송흥국 목사가 장창덕 목사 후임으로 부임했다. 송흥국 목사는 1951년 5월 27일 창설된 해병대사령부 초대 군목실장-장창덕 목사 포함 제2대 군목실장-이 되었다. 그는 제2대 해군정훈감을 역임한 감리교 목사였다. 제도화된 군목실 기구를 마련하고 실장 예하에 행정과장과 대원 3명을 두고 업무를 시작했다. 초대 행정과장으로 정훈감실에서 근무하던 신학교 출신 김동선 문관이 전입했다. 하지만 해병대사령부가 진해에서 부산 용두동으로 이동한 직후라 적당한 교회 시설이 없었고 제대로 예배를 드릴 수도 없었다. 따라서 그는 과업정렬 때마다 시간을 할당받아 장병정신교육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해병대사령부교회가 정상 궤도에 오른 것은 해병대 최초 군종장교인 박창번 군목(대위) 부임 이후였다. 1951년 8월 27일 해병대사령부로 발령을 받고 9월에 군종실장으로 취임한 그는 해병대사령부교회 발전을 위해 분주하게 활동했다. 박창번 목사는 1952년 4월부터 사령부 강당을 예배 장소로 선정, 교회 활동을 재개하였다. 주일 예배에는 영외거주자들이 가족동반으로 참석하였고, 수요 예배와 주일 저녁 예배는 사령부 근무 해병들이 참석하였다.


부산 주둔 시절, 해병대사령부에는 교회가 없었다. 박창번 군목은 용두산 산정에 해병대사령부교회를 신축하고, 1952년 5월 4일 해병대 창설 4주년 기념 및 교회 준공 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에는 이승만 대통령 부처와 부통령, 심계원장, 김일환 국방차관, 손원일 해군 총참모장,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을 비롯한 정부요인과 주요 지휘관들, 해병대 장병들과 일반 교우가 참석하였으므로 교회는 초만원이었다. 박창번 군종 목사의 사회로 시작된 예배에서 정달빈 해군 군목실장이 '조국의 위기'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고 성가대의 '할렐루야' 찬양, 김천애 여사의 '저 생명 시냇가에' 특송이 있은 후, 부통령 함태영 목사의 축도로 준공예배를 마쳤다.


해병대사령부 교회 박창번 군종목사가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를 설치하여 운영하다.


해병대사령부 교회에 시무던 박창번 군목은 인천 상륙작전, 도솔산 전투, 김일성 고지 전투 등으로 상이용사가 된 해병들을 건전한 인격의 기술인으로 만들어 생활전선에 내보내고 싶어 했다. 해군 부인회(회장 홍은혜 여사, 초대 해군참모총장 부인)에서 지원한 40만 원과 영락교회 김낙규 집사의 헌신으로 제1차 전역자 10명에게 기계 수선 기술을 강습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1951년 11월 15일 신현준 해병대사령관 지시와 김성은 교육단장 배려로 해병대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가 정식 발족하였다. 박창번 군목은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 부속 교회인 일맥 교회 창설과 군종업무 체계 확립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후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는 확대되어 해군에서 운영하게 되었고, 1955년 6월 20일 원호청으로 이관되었다. 박창번 군목은 제6대 해병대사령부 군목실장으로 다시 부임하여 전도 문고 발간에 힘을 기울이며 전택부 선생이 쓴 「정의와 자유와 개화사상」이란 책자를 출판하기도 했다.


해병대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 제1기 수료기념 @해군 군종사 제1집(1948-1965)
일맥 교회 심령부흥회 @해군 군종사 제1집


1952년 10월 27일 박창선 군목이 제3대 해병대사령부 군목실장으로 취임하였다. 주일 예배에는 60명의 교인이 모였고, 인근에 위치한 덕성여고 학생 위주로 구성된 성가대가 함께 했다. 성찬식이 연 2회 베풀어졌고, 박창선 군목은 해병대사령관 김석범 장군을 전도하여 그의 세례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박창선 군목은 영창 방문, 내무실 방문, 마산 형무소 방문도 하였으며 박동선 문관이 군종업무를 도왔다.     


그는 군종 예산 획득과 해병 전도 문고 발간에 힘을 기울였다. 해병대 자체에서 예산을 획득해서 「기독교 신앙 문답」 1,500부, 「군목 설교집」, 「가톨릭 신앙의 기초」, 「기독교 신앙 원리」, 「행복의 길」 등 해병 전도 문고 5집을 발행하였다. 탈영병 구제를 위해 자수기간을 설정하도록 권유해서 탈영병들이 원대 복귀해서 근무할 수 있도록 주선하고 그들을 도왔다.


1953년 11월 1일 해병대사령부교회에서 제2대 해병대사령관 김석범 소장 취임예배가 있었다. 1954년 성탄절, 박창선 군목 집례로 김석범 사령관, 박정오 소령, 박동열 소령 등 10명이 세례를 받고 8명이 학습을 받았다. 김석범 사령관은 매 주일 사령부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며 장병들의 신앙 무장을 권고하고 신앙의 해병이 되길 원했다. 그는 기독교인이 된 경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기독교를 믿게 된 것은 해군의 역사와 때를 같이 한다. (중략) 1951년 9월에 서부전선 임진강 지구에 출동하는 전투단 단장으로 부임하였다. 그 후 나는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려고 노력했고 목사님이 하는 일을 이해하게 되었다. 당시 전투단의 군종 목사님은 장병들에게 일요일 예배시간을 통해 유익한 설교는 물론 전 장병 위문과 전사자 장례식을 종교의식으로 거행하여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족들과 전우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휴전 협상 중이지만, 매일 밤 벌어지던 적과의 야간전투에서 밤 1시에 군목이 전투지휘소 작전실에 나타나 해병 장병들의 노고를 위로하면서 교전 중에 있는 일선 장병들의 무운을 빌며 기도를 했다. 나는 지금도 목사님이 상황도를 보고 나서 기도하시던 것이 잊히지 않는다. 이때 목사님이 와있던 것이 사단장이나 군단장이 옆에 있는 것보다 더 반갑고 의지가 되었고 안정감을 느꼈다. 전투단장을 마치고 부산 사령부로 내려와 (중략) 해병대사령관직을 신현준 사령관으로부터 인계받고 첫째 사업으로 사령관실 바로 옆의 대강당을 교회로 겸용케 하고 예하 장병들에게 교회에 나갈 것을 권유하였으며 나도 매주 가족들과 같이 교회에 갔다. 그리고 당시 군목실장 박창선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박창선 군목 재임 중 용두산 산마루에 해병대사령부교회가 신축되었다. 이 교회는 군용 콘세트 2동을 연결하고 앞에 종각을 세운 것으로써 피난 중인 군인교회치곤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1954년 4월 착공, 6월 10일 완공했다. 미 해병 고문관들이 교회 제단용 십자가와 촛대를, 어느 미군 부대에서 피아노를 기증하였다. 하지만 이 교회는 1954년 12월 11일 발생한 용두산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해병대사령부 교회(부산 용두산) 봉헌 예배 1954.6.10. @해군 군종사 제3집
부산 용두동 화재민 수용소에서 구제활동 중인 반병섭 군종 목사 @해군 군종사 제3집


1955년 2월 20일 유영근 군목이 박창선 군목 후임으로 해병대사령부 교회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정부 환도에 이어 해병대사령부와 함께 교회도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한동안 사령부 브리핑실을 예배 장소로 사용하다가, 수송대 옆 콘세트 교회가 마련되었다. 당시 해병대사령관 김석범 장군의 배려로 만들어진 이 교회에서 환도 기념예배 및 해병대 군종업무(교회) 창설 6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는 백낙준 박사의 설교, 서울시장의 축사, 함태영 부통령의 축도로 진행되었고, 김석범 해병대사령관의 은혜의 말씀이 있었다. 1956년 4월 15일 해병대 창설 기념 예배 후에는 강기천 대령 외 14명이 세례를 받았다.     


강기천 대령은 후에 제7대 해병대사령관이 되었다. 해병대는 가톨릭 신자인 제1대 사령관 신현준 장군을 제외하고, 제2대 김석범 사령관으로부터 제3대 김대식, 제4~5대 김성은, 제6대 공정식, 제7대 강기천 사령관에 이르기까지 개신교 신자였다. 초창기 해병대사령관들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창설 초 해병대의 모습 가운데 기독교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초대 해병대사령관 가톨릭, 2대에서 7 사령관 개신교 신자였기에
창군  해병대기독교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김석범 사령관은 용산의 언덕 지대에 자리 잡은 해병대사령부의 가장 높은 곳을 교회 신축 부지로 선정하였다. 사령관의 적극적 협조로 박영근 군목은 군용 콘세트 2동을 연결한 십자가형 교회를 마련할 수 있었고 교회의 내부도 아담하게 장식하였다. 당시 해병대 교육단 교회와 합병된 해병대 보급 정비단 교회의 내부 시설물을 대부분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해병대 보급 정비단 교회는 미 해병대 교회 시설을 그대로 인수하였었기에 그 설비가 매우 훌륭했다. 주일 예배에는 70명 내외의 교인이 참석하였고, 신우회 주최로 주일 저녁 예배도 드렸다. 이 신우회는 환도 이후 1955년 4월경 신앙이 돈독한 군종감실 신모 하사관에 의해 발족한 것이다. 아마도 해병들을 중심으로 이룩된 3군 최초의 신우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1956년 2월 1일 육군, 해군, 공군 신우회 회원들을 모두 초청하여 제1회 각군 연합 좌담회를 해병대사령부 식당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해병대사령부 교회에서 열린 3군 신우회 연합 좌담회 @해군 군종사 제1집


유영근 군목은 문서선교에 관심을 갖고 신앙잡지 「불기둥」을 발행해서 해병들의 종교생활에 도움을 주었으며, 전방 초소와 벙커에도 전달해서 해병 장병들이 읽어 볼 수 있게 했다. 처음 발행할 때에는 별도로 할당된 예산도 없었고 인쇄 계획에도 제대로 반영이 되지 않아서 군목들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무료 원고를 구해서 편집하였다. 제7호부터 예산이 반영돼서 1973년 사령부가 해체될 때까지 「불기둥」지를 계속 발행하였다.      


해병대사령부 군종감실에서 발간한 불기둥 @www.yetnal.co.kr


박창번 군목이 1956년 6월 18일 유영근 군목 후임으로 해병대사령부교회에 부임하였다. 모든 업무가 예전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박창번 군목은 제대하고 1957년 4월 13일 전덕성 군목이 부임하였다. 1958년 5월 4일, 해병대 창설 9주년 기념 예배와 교회 창설 기념 예배를 드렸다. 홍현설 박사가 설교하였다.     


전덕성 군목 재임 중, 해병대사령부교회가 콘세트 건물에서 콘크리트 구조의 영구 건물 교회로 신축되었다. 이 교회는 전덕성 군목의 노력과 제3대 해병대사령관 김대식 장군의 의도에 따라 국가 예산으로 건축되었다. 14,098,353 환 상당의 이 교회는 상전 기업 주식회사(대표 김덕준)가 1959년 11월 14일 착공, 12월 31일 준공하였다. 건평 60평의 시멘트 콘크리트로 해병대사령부 교회가 신축되었다. 이 교회는 내부도 잘 설비되었고 하몬드 올갠도 설치하였다.      


1959년 11월 건립한 해병대사령부 교회 전경 @해군 군종사 제1집
1959년 11월 건립한 해병대사령부 교회 모습을 원형대로 복원한 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 현재 모습 @Kenny


해병대의 역사이기도 한 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에는 ‘해병대 DNA’를 엿볼 수 있는 뜻깊은 조형물이 있다. 예배당 중앙에 자리 잡은 커다란 십자가다. 이 십자가는 1951년 해병대 제1연대가 북한군에 맞서 혈전 끝에 탈환했던 강원도 도솔산에서 자란 고로쇠나무로 만들어졌다. 700여 명의 전·사상자를 내면서도 도솔산 고지를 탈환해낸 전투로 해병대 역사에 길이 남는 작전 가운데 하나다. 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에 의하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해병대 전우들의 고귀한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도솔산에서 나무를 가져와서 이 십자가를 만들었다고 한다.              


도솔산 고로쇠나무로 만든 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 내부 십자가 @www.ohmynews.com


1961년 5월 29일 송창설 군목이 전덕성 군목 후임으로 해병대사령부 교회에 부임하였다. 해병대사령부 기독 장교회의 움직임도 활발해지면서 교회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기독 장교회 회장 이봉출 대령은 다른 회원들과 함께 가족동반으로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고, 문희석 대령은 문교부장관으로 임명된 이후에도 줄곧 이 교회에 출석했다. 주일 오후에는 해병 막사에서 예배가 거행되었고 영창 방문도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1962년 4월 17일 김광덕 군목이 송창설 군목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주일 오전 예배는 40~50명이 참석했고, 수요 예배는 사정에 따라 간헐적으로 실시하였으며, 영창 예배와 막사 예배도 계속하였다. 막사에서 드리는 주간 예배에는 70~80명이 모였다.     


1963년 11월 12일 김광덕 군목 후임으로 한기원 군목이 부임하였다. 30여 명의 기독장교회 회원들이 주간 성경공부, 월간 초빙강연, 구제사업 등을 하였다. 신우회는 40여 명의 회원이 주간 성경공부, 헌신예배 등을 하였다. 해병대사령부 교회 교인은 120명 재적인원에 40명 내외가 예배 출석하였다.     


1964년 2월 9일 사령부 교회에서 공정식 장군의 사령관 취임예배를 거행하였다. 해병대사령부 기독장교회는 회장 이봉출 준장, 부회장 오종해 대령, 총무 임경섭 중령, 부총무 임춘하 대위, 홍경석 대위를 선출하였다. 신우회도 40여 명의 회원이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종영 군목이 성경 연구반 운영을 계속하였으며 사고 방지를 위해 수감자와 퇴창자 선도에 힘을 기울였다. 1968년 10월 21일 손흥수 군목이 이종영 군목 후임으로 부임한 이후 막사 예배를 실시하였다.     


1971년 7월 12일 김용원 군목이 손흥수 군목 후임으로 부임한 후 기독장교회 가족들이 사령부 교회에 출석해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매월 둘째 주일에는 기독장교회 헌신예배로 드렸다. 1971년 12월 9일 교도소 부흥회를 실시한 후 53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1971년 10월 20일에는 지명관 교수를 초빙하여 교양강좌를 개최하였다.     


1972년 2월 15일 주계명 군목이 김용원 군목 후임으로 부임한 후, 1972년 6월 21일부터 23일까지 무의탁 사병 위로회를 실시하였고, 1973년에는 보호사병 위로회를 실시하였다. 1972년 2월 30일 교도소 수감자 30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Wilson 박사(빌리 그레햄 목사 일행)를 강사로 종교 강연회를 하였으며, 6월 6일 하사관들을 인솔하여 가나안 농군학교를 견학시키고 새마을 정신을 고취시켰다.     


1973년 10월 10일 해군부대 기구 개편(해병대사령부 해체)으로 해병대사령부 군종업무는 해군본부 군종감실로 폐합되었다. 그동안 광석교회, 영락교회, 마르다 교회, 보성여고, 켄디컬 성가대, 순복음 중앙교회, 서소문 교회, 개혁교회, 응암교회, 영은교회, 기독교학생 선교회, 영등포 감리교회, 문화촌 교회, 성만여상, 용산 제1교회, 산돌교회, 서울예고, YWCA Y-Teen, 청파 성결교회, 신설동 교회, OCU(기독장교회) 부인회 등이 군목을 도와 교도소 수감자들을 위문하였다.


이후의 해병대 교회 70년사는 종이책 또는 전자책으로 발간될 것이다.


[표제 사진: 최초의 군인교회라고 할 수 있는 김대식 중령의 국방부 관사 33호 '용산 군인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교인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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