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군인교회 70년 역사에 하나의 기록으로 남겨지다
6.25 전쟁에서 조국을 수호하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몸이 불구가 된 상이용사들은 정신마저 불구가 되어 생계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이들을 진심으로 동정하고 위로하며 신앙으로 새 출발할 수 있도록 선도하는 것이 중요했다. 해병대사령부 군목실은 '해병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를 설립하여 상이용사들에게 갱생의 길을 열어 주었다. 전쟁이 치열해지고 부상병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해병대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의 기구를 확장하여 해군에서 운영하게 되었다. 이후 1955년 6월 20일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가 원호청으로 이관될 때까지 해군본부 군목실이 업무를 통제하며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를 운영했다.
인천 상륙작전, 도솔산 전투, 김일성 고지 전투 등으로 해병대에는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6.25 전쟁 당시 국가나 사회에서 이들을 구제할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 해병대사령부의 박창번 군목실장은 해병대 상이용사들을 건전한 인격을 소유한 기술인으로 만들어서 생활 전선에 내보내고 싶었다. 해군부인회(회장 홍은혜 여사,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의 부인)로부터 40만 원의 협조를 받고, 영락교회 김낙규 집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제1차 상이군인 전역자 10명에게 기계 수선 기술을 강습한 것이 그 발단이 되었다. 1951년 11월 15일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의 지시와 김성은 해병대 교육단장의 배려로 '해병대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가 발족하게 되었다.
1951년 12월 1일, 상이군인 36명을 수용하여 제1기생의 수업을 시작했다. 당시 학교 교사로 부산 역전에 있는 부산여객 주식회사 건물 1동을 빌려 수업을 하였으며, 강사로는 김낙규, 김규찬, 최기영 집사와 이수한 전도사가 무보수로 강의하였다. 초대 소장으로 박창번 군목이 취임하였고 김동선 문관(군무원)이 행정을 담당했다. 당시 교육은 사진, 프린트, 영문 타자반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박창번 군목은 상이군인들에게 생활력을 갖게 해서 그들이 완전한 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바랐으며,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가 내세운 교육이념은 경천애인, 기술 연마, 자력갱생이었다. 생활신조도 마련하였는데, “첫째, 기술보다 먼저 사람이 되자, 둘째, 몸은 불구자이나 마음조차 불구 일소냐, 셋째, 하면 된다, 우리 일은 우리 손으로”였다. 이 생활신조는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의 소훈이 되었다.
박창번 군목은 상이군인들이 자력갱생한 기술인이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이 되길 바랬다.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는 개소 4개월 만인 1952년 3월 31일 제1회 수료생 7명을 배출하였다. 이날 수료식에서 정달빈(2016년 개봉한 영화 '오빠 생각'에서 임시완이 배역을 맡은 군인 한상렬) 해군 군목실장이 ‘인생 항해’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그들의 내일을 축복하였다. 해병대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는 1952년 11월 26일 해군에 이관되기까지 3개 차수에 걸쳐서 137명을 배출하였다.
전쟁이 더욱 치열해져서 부상병과 전상자들이 계속 늘어나자 해병대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만으로는 부상병들을 전부 수용하여 교육할 수 없었다. 1952년 12월 해군은 해병대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의 기구를 확장하고 해군과 해병대의 상이군인을 함께 수용하도록 하였으며 기술 교도소의 명칭도 '해군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로 바꾸어 운영하고, 해군 군목실이 업무통제를 하면서 해군 부인회에서 운영비를 전담하도록 했다.
1953년 2월 1일 오전 11시 상이군인 기술 교도소 안에 상이군인을 위한 부속 교회를 창설했다. 박창번 군목의 인도로 진행된 예배에는 139명이 참석하였으며, 이 교회의 이름을 ‘일맥 교회’라고 불렀고, 매년 부흥회를 하여 상이군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이 글은 2021년 1월 25일 부크크에서 종이책과 전자책으로 발행한 '해병대 교회 70년사'에 제8화로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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