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그날이 왔다.
사랑하는 딸이 아빠 엄마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결혼 전의 마지막 아빠 생일 선물이라며 노트북컴퓨터를 사줬다. 결혼식을 앞두고 아빠 엄마에게 의미 깊은 선물을 하고 싶다더니, 아빠 선물로는 노트북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5년 동안 다녔던 직장도 그만두었고 결혼 준비를 위한 자금도 넉넉하지 않은데, 예비 사위가 보탰다며 맥북을 선물해 주었다.
딸 아이는 대학 시절에도 4년 내내 아르바이트해서 부었던 적금을 깨서 나의 생일선물로 노트북 그램을 사 준 적이 있다. 수년 동안 잘 사용하던 그램을 대학원에 간 아들에게 주었더니, 다시 아빠의 생일선물로 최신형 그램을 생각했다고 한다. 노트북을 선물한다고 해서 아빠는 그램보다 맥북이 더 좋다고 하니까 잘 생각해서 결정해 달라고 했다. 아내는 가끔 컴퓨터를 사용하는 자신을 위해서는 익숙하지 않은 맥북보단 그램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웹 서핑으로 그램과 맥북을 비교해 본 다음, 적당한 가격의 맥북으로 마음을 정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 온 딸아이가 날 보며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아빠! 매장 직원과 상담을 했는데, 아빠에게 필요한 용도로는 맥북보다 그램이 더 낫다고 해서 최신형 그램을 샀어. 매장에 없어서 주문했는데 며칠 걸린데!” 딸이 자기 말을 듣고 머쓱해 하는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그램보다 맥북을 생각했다고 말했더니, 당장 컴퓨터 매장으로 가자고 했다. 맥북과 그램을 직접 비교해 본 후에 맥북이 더 좋으면 바꾸자는 것이었다.
내 성격을 잘 아는 딸 아이가 말했다. 남자 친구와 함께 선물을 고르면서 아빠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바꾸지 않기에 맥북으로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는데, 직원을 설명을 들은 남친이 매장에도 없는 최신형 그램을 주문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선물은 며칠 기다렸다 받는 것보단 오늘 당장 받는 것이 더 낫지 않냐는 딸과 전자제품 매장으로 향했다. 먼저 그램이 전시된 곳을 대충 둘러본 후 내가 원하는 사양의 맥북이 있는 곳에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이미 내 마음은 맥북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알아 챈 딸이 계산대로 가더니 그 맥북을 구입했다.
마음이 꽂혔던 맥북을 들고 귀가하던 길에 아내가 잠시 쉬었다 가자고 해서 카페로 들어갔다. 아내가 딸에게 “호기심이 많은 네 아빠는 집에 들어가자 마자 맥북부터 만질 거야”라면서 장담한다고 했다. 난 오늘 곧바로 포장을 뜯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아내에게 만원 내기를 걸었다. 커피를 마시고 얘기하면서 30~40 분이 흘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난 아내에게 만원을 줬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을 연동시켰고 궁금했던 기능을 사용해 보았다. 그리고 한글프로그램과 연동되는 프로그램도 설치했다. 이젠 맥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준비가 모두 끝났다.
다음 날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맥북을 열어보니 메모장에 딸 아이가 써 놓은 글이 있었다. “아빠의 장난감이 새로 생겼다. 아빠가 집에 오자마자 바로 아이폰과 연동시키고 다운 받을 것들도 전부 다운 받아 놨다. 오늘 개봉하느냐 안하느냐로 엄마 아빠가 만원 내기를 했는데 구매 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엄마에게 계좌이체를 했다. 아빠가 무척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다. 아빠가 기뻐하니 나도 기쁘다. 아빠가 유용하게 잘 사용하면 좋겠다. 나중에 00(예비 사위)가 돈 많이 벌어서 엄마 아빠 좋은 거 계속 더 많이 사줄수 있으면 좋겠다. ㅋㅋㅋㅋㅋㅋ 아멘(히브리어로 그렇게 되게 하소서).”
며칠 후의 일이다. 해질 녘에 딸이 아내와 동네 한바퀴를 돌면서 떡볶이를 먹고 카페도 가고 엄마 팔짱을 끼고 산책을 했다. 평소 답지 않은 딸의 행동이다. 시집 갈 준비를 하고 있는 딸이 우리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다. 28년을 품 안에서 애지중지하며 키운 딸이 가정을 이루고 어른이 되기 위해 우리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가 해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대사가 떠오른다.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헤어지기로 결심한 순간, 그녀의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딸아이도 부모와 헤어질 결심을 하니 아빠 엄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더욱 솟구치는 모양이다. 나와 아내도 딸과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다. 마냥 어린 줄만 알았던 딸 아이가 어느덧 엄마보다 더 커져서 시집을 간다고 한다. 딸의 손을 잡고 예식장에 들어설 땐 눈물을 감추어야 할 텐데!
* 이 글은 [월간 에세이] 2023년 5월호에 게재된 작가의 수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