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렇게 색 바랜 추억을 들추다
신촌에서 동교동으로 걸어오다 보면 중고서점이 몇 군데 있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아선지 근처에 가거나 시간이 여유로울 땐 필요한 책이 없어도 습관처럼 들어가 낡은 책 냄새를 맡으며 한 바퀴 돌아 나오곤 하죠. 때때로 마음이 끌리는 책은 집까지 데려오기도 합니다.
한 번은 <청소부 밥>이라는 책을 데려왔다가 책갈피 사이 잘 말린 네 잎 클로버를 다섯 개나 발견하는 행운도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손을 한 번은 거쳤을, 테두리가 누렇게 바래진 책을 보면 괜히 한 번 펼쳐보기도 합니다. 앞장 여백에 짧은 메모가 있을까 하고요. 얼마 전에도 메모에 마음이 끌려 담아 온 책 2권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00
내 마음을 담아 너에게 보낸다.
00으로부터'
실제 이와 비슷한 내용이 가장 많습니다. 좋은 책을 골라 누군가를 생각하며 적었을 글귀들, 특히 이름이 적혀있는 메모는 이유도 없이 마음을 비비고 들어와 한동안 눌러앉기도 합니다.
김용택 님의 누렇게 바래진 <섬진강> 여백에 1988년 병원에서 생일을 맞은 성자라는 사람에게 쓴 현식의 메모를 읽고는 30년이 지난 지금 성자 씨가 어디선가 현식 씨와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짧은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법정 스님의 문고판 <무소유> 첫 장에서 '97.3.3... 주은'이라는 짤막한 메모를 발견했을 때는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한구석이 아파졌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성자와 현식과 주은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한때 청춘이었을 이들도 지금은 흰머리 늘어남을 걱정하는 중년의 삶을 살아내고 있을까요?
중고서점에 빽빽이 꽂혀있는 누렇게 색 바랜 추억들, 20년 전 떨리는 손으로 적어 내려갔을 수줍은 고백들, 글자 저 편 푸릇했을 그들의 청춘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한때는 가슴 떨렸을 소중한 글자를 중고서점에 밀어 넣은 사연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누구든 신촌에 가시면 중고서점에 들러보세요. 빽빽하게 꽂혀 숨쉬기도 버거운 책들 사이 묻혀있는 오래전 성자와 현식, 주은을 만날지도 모르니까요.